일진일퇴
자이가르닉효과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혹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시험에서 틀린 문제는 계속하여 기억에 남고 정답을 맞힌 문제는 기억에서 사라지는 그런 경험 말이다. 이것이 바로 자이가르닉 효과이다. 해결된 문제는 기억에서 사라지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계속하여 생각이 나서 우리를 고통에 밀어 넣게 된다. 내가 힘든 이유를 찾아냈다. 유레카! 그건 내 지난날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면서 나는 ‘용서’라는 것에 갈급함을 느꼈다. 용서를 한다면 나는 비로소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용서가 뭘까? 가해자의 사과와는 별개로 피해자가 내가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난 용서의 전제조건에서 막혀버렸다. “가해자” 삶의 과정을 들여다보고 그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하고 연민을 느끼고 수용하는 것이라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나는 내 부모처럼 되지 않기 위해 이렇게 이 악물고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데. 당연하듯 살아가는 당신들을 이해하라고? 가당치도 않았다. 조금은 용서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용서의 의미를 알고 나니 다시 멀어진 기분이었다. 일진일퇴라고나 해야 할까? 내 상황이 우스웠고 과연 이 긴 여정이 끝은 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신물이 났다.
(선) 요즘은 좀 어떠셨어요?
(나) 제가 궁극적으로 편안해지려면 그들을 용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 잘 알고 계시네요. 용서해야 본인이 편안해진다는 것을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땐 미정 씨는 아직 부모님을 용서할 상황은 아니에요.
(나) 네, 근데 제가 도대체 용서가 뭘까?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상대가 살아온 과정을 알아보고 연민을 느끼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는 거라는데. 그건 제게 너무 어려운 거더라고요.
(선)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용서는 그냥 심플하게 용서예요. 상대방의 사과 이런 거 다 상관없이 ‘나는 당신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난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착각하지 마세요. 내가 이 사람들을 용서하면 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닐까? 혹은 이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갖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순간 절대 용서 못 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용서했다고 해서 그분들의 얼굴을 볼 생각은 하지 말아요. 용서했다 해서 다시 잘 지내봅시다. 이런 의미가 절대 아니니까. 명심하세요.
(나) 네, 그건 저도 동감해요. 용서한다고 해서 다시 볼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런데 또 웃기게도 요즘엔 제가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 대체 뭘 사과받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요.
(선) 부모님으로부터 무엇을 사과받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고요? 그건 고민하지 마세요. 아버님이 개과천선해서 바뀌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애써 힘쓰지 마세요.
(나) 그리고 제가 또 드는 생각이 엄마에 대한 원망이에요. 원망이 점점 커져요. 신랑은 어머님께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멈출 수가 없어요, ‘이렇게 돌아갈 거였음. 나한테, 사위한테 말하지 말았어야지! 어렸을 적부터 안 그래도 싫어하는 아빠였는데 나한테 와서 아빠 욕을 하지 말았어야지! 숨죽이면서 혼자 다 참았어야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신랑은 저한테 자꾸 그러지 말라 해요. 그래서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선) 어머님도 잘못하신 거 맞아요.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결혼을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뒤늦게라도 알았다면 이혼하시든지 이혼하지 않을 거였다면 현명하게 대처해야 했어요. 그런데 항상 자식인 미정 씨에게 이야기했죠. 그리고 미정 씨는 어머니에게 동조했고 편을 들어주었어요. 어머님은 그 방식에 젖어 들 은거예요. 그래서 미정 씨에게 의존하게 된 거죠. 그게 미정 씨가 잘못한 거예요. 용서하고 싶으시다고 했죠? 미정 씨가 용서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아버지를 용서하세요. 다음은 어머니. 그리고 마지막은 미정 씨 본인을 용서하세요. 그리고 사랑하세요. 첫 번째는 본인, 두 번째는 배우자와 아이들, 세 번째는 부모님. 그런데 미정 씨는 부모님 사랑하지 마세요. 그게 미정 씨에게 좋아요. 미정 씨도 아시죠? 그리고 중요한 거. 그게 누구든 미정 씨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이렇게 말하세요. ‘당신이 겪어봤어? 아니잖아. 그건 당신 생각이고.’ 아시겠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용서하라니. 병원 근처 카페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내가 엄마를 그렇게 만든 거였다니. 그래 그거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난 분명 피해자인데 왜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하는 걸까?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내 기억들을 감정들을 모조리 파헤치고 난 후에야 알아차렸다. 난 어엿한 성인이 되어서도 아빠에게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했구나. 내가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던 거였다. 내가 언젠가 당신에게 이 분함을 터뜨리고 나면 나에 대한 화가 해소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