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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 Nov 11. 2024

사랑 별거 없네!

난 그냥 이 집안에 있는 가구 같아

지난 회기 상담을 하고 난 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 홀로 ‘공허함과 애정결핍으로 뒤덮인 나’를 직면하게 되었고, 이는 ‘감정의 증폭제’가 되어 한동안 꽤 심적으로 힘들었다.




문득 신랑과의 갈등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첫째 하준이를 낳고 출근하는 신랑이 늘 새벽 수유를 해주었다. 그런 신랑에게 내가 유일하게 감사함과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밥과 집안일’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보니 점점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갔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데 당신은 나를 위해 하는 게 뭐야?’

‘누구는 놀아? 나도 애들 보고 집안일도 하잖아. 내가 안 하는 거 아니잖아. 그리고 누가 그렇게 청소하고 밥 해달라고 했어? 내가 항상 이야기하잖아. 애들 어린이집 보내고 나면 그냥 좀 쉬라고’

‘…. 하…. 됐어. 자기가 요즘 내 기분을 알아? 난 그냥 이 집안에 있는 가구 같다고.’     




둘째마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서 집안일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언젠가 신랑과 다투다가 한 말이었다. 매일 같이 수십 번도 현관을 닦고 쓸고 집 안을 청소하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신랑과 아이들을 위해 요리를 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싫어서였다. 당시 나의 성취감을 느끼기 위함이라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신랑과 아이들에게 사랑 표현하는 걸 넘어 사랑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집착했던 거였다. 통렬하게 바라보고 나니 부정적인 상념에 빠졌다. 지금은 아이들이 어리기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지만 아이들이 성장해 나가면서 그 사랑이 끝날 텐데 그때의 난 정말 괜찮을 수 있을까? 신랑은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없는데 덜컥 겁이 났다. '분명 그땐 지금보다 더 공허할 거고 애정결핍이 나를 잠식하고 말 거야.'  



그 주 주일 사모님이 요즘 내게 어떻게 지내냐며 으레 묻는 안부. 예전의 나였다면 ‘좋아요. 괜찮아졌어요. ’라고 말했을 내가. 처음으로 ‘음…. 조금 힘들어요.’라고 답했다.     


(나) 사모님, 저는 공허하고 애정결핍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마주하고 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위로가 절실하면서도 사람들의 위로와 관심이 너무 어려워요. 살면서 그런 걸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사모님) 집사님, 그랬구나. 저도 예전에 힘든 일이 있을 때 모든 지인과 연락을 다 끊었었거든요. 당시 친했던 지인에게는 연락이 안 오기도 하고 그래서 상처받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지인들에게 무슨 일이 있냐며 안부 연락이 오기도 하더라고요. 저도 애정결핍이라 집사님처럼 처음엔 위로가 낯설었는데 받다 보니 익숙해지더라고요.

(나) 그건 맞아요, 확실히 처음과 달리 위로의 힘이 조금씩 느껴지는 것 같아요. 여전히 어렵지만요. 아이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끝났을 때 그때가 무서워요. 그 이후에는 사랑을 어디서 받죠?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걸지도 몰라요.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다고 하니까. 그거 받고 싶어서.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제 공허함을 채우지 못하는데 종교는 그렇지 못하니까. 그래서 기복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것 같아요. 뭐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전 버틸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신다는데 사랑받지 못했던 제가 하나님의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낄 수나 있을까요?

(사모님) 집사님, 하나님의 사랑이라 해서 꼭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은 아니에요. 교인을 통해서 혹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에게서 집사님을 위해 걱정해 주고 위로해주는 것. 그게 사랑이에요. 저도 집사님 사랑해요. 안아줘야겠다. 힘내요, 집사님. 저 집사님 생각 많이 해요. 집사님을 위해 늘 기도할게요.

     



원가족에게서 벗어나 보겠다고 애면글면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회의감을 느낀 내게 사모님의 말씀은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원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난 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거나 하면 불편해하고 거리를 두었었다. 한 편으로는 먼저 다가가고 싶어도 어린 날의 따돌림 사건으로 상처를 받을까 겁이 나기도 했다. 거부당하면, 상처받으면 어떡하나? 전전긍긍. ‘난 당신을 위하는데 날 거부하니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 방어기제. 어찌 보면 나의 피해망상이었다.




분명 난 언제 어디서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사랑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난 몰라도 너무도 몰랐다. 왜 내가 받고 싶은 사람에게만 사랑을 받아야만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의 미성숙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어른 아이’였다. 그래서 요즘은 먼저 용기 내어 사람들에게 다가가 사랑을 주기도 하고 타인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혹 조금 상처받으면 어떠한가? 그리고 내가 먼저 사랑을 주면 어떠한가?  그러니 텅 빈 내 가슴에 조금씩 충만함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약하고 유약한 나지만 점점 단단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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