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어른들은 빵집에서 데이트를 하셨다고 하는데, "이 빵 먹으면 나랑 사귀는거다." 라고 고백하진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나에게 다이어트할 때 식당보다 힘든 곳이 카페이다. 맛있는 디저트빵들이 강렬하게 나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온갖 종류의 맛있는 빵이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나의 추억과 함께 하는 빵이 몇 가지 있다.
기억 속 첫 번째 빵은 땅콩샌드이다.
삼립이던가 기린이던가. 슈퍼에서 파는 봉지에 든 땅콩버터샌드이다.
30여 년 전 이 빵은 좋은 간식이었다.
지금은 부드럽고 버터향 가득 나는 식빵이 많지만, 그 시절의 빵은 요즘의 그것에 비하면 투박한 편이었다. 조금은 딱딱하기까지 한 식빵 두 조각 사이에 고소하고 부드럽게 자리 잡은 땅콩크림이 웅크린 채 뭉쳐져 있다. 빵의 한쪽 뚜껑을 열어 크림의 상태를 확인한다.
위치파악 완료.
마주한 식빵 두쪽을 이용해 문질 문질 삭삭 고루 펴준다.
그다음 준비물은 뽀얀 우유이다. 주둥이가 넓은 컵에 꼴록 꿀럭 가득 담은 후 입수 준비를 마친 땅콩크림빵을 푹 담근다.
2초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우유에 유의하며 입안 한가득 베어 문다.
꺼끄러운척 하던 식빵표면은, 우유의 위로에 한껏 풀어져 입안에서 부드럽게 맴돈다. 강단 있게 우유를 밀어내던 땅콩크림도, 어느새 모두에게 동화된 채 함께 녹아내린다.
부드럽고 고소하고 달콤하다.
한 봉지를 뜯으면 땅콩샌드 두 개가 들어있었기에 엄마와 하나씩 나눠먹었다. 얘기하다 보니 먹고 싶다. 글을 마저 쓰고 마트에 다녀와야겠다.
나의 기억 속 두 번째 빵은 여행지에서 먹은 빵이다.
20대 초반, 홀로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평생을 함께 할 빵과 빵 친구를 만나게 된다.
낯선 곳에서 혼자 맞이하는 여행의 첫날 아침. 11월 중순의 런던은 긴장된 내 마음을 닮은 듯 서늘했다.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미어캣은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유스호스텔에서 제공되는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왔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나는 더 주눅이 들어버렸다.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기다란 나무식탁에 둘러앉은 외국인들이(여기선 내가 외국인인가?) 식당에 입장한 나를 일제히 쳐다본다. 파란 눈, 갈색눈들이 이방인의 등장을 호기심 있게 쳐다보는 느낌이랄까.
가난한 배낭여행자였던 나는, 굶을 수는 없었기에 대충 먹고 올라가야지 생각했다. 따뜻한 코코아와 식빵, 딸기잼, 버터를 들고 아무 곳에나 앉았다.
식빵에 버터를 발라 먹는데 아니, 왜 이렇게 맛있지? 입안 가득 고소한 향이 퍼지면서 크리미 한 감촉이 혀를 감싼다.
아마도 그전까지 나는 케이크나 소보로, 크림빵 같은 달콤한 빵 위주로 좋아했던 걸로 기억한다.
식빵+ 버터의 조합은 단맛이 없음에도,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취향이었다.
버터만 발라서 한 입, 딸기잼을 추가해서 또 한입.
아까의 긴장감과 어색함을 날려 버리는 즐거움이었다.
그 뒤로도 여행 내내 나의 아침을 책임져 준
빵과 버터의 조합.
지금까지도 나는, 뷔페에 온갖 산해진미가 다 있어도 구운 식빵과 버터를 꼭 먹는다.
세 번째 빵은 붕어빵이다.
붕어빵을 파는 곳이 가까운 주거지역을 '붕세권'이라고 한다. 우리 집은 붕세권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온 가족이 다 같이 동네를 한 바퀴 돌며 걷는다. 추워진 저녁공기를 따라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붕어빵이다.
"붕어빵 먹을래?" 가족들이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먹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건강학적으로 보자면, 안 걷고 안 먹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애들 아빠가 저녁에 혼자 운동삼아 걸으러 나간 날은 어김없이 '붕어빵 사주까?' 하는 문자가 가족 단체방에 도착한다. 나는 남편의 그 문자가 가족을 향해 고백하는 "사랑해"라는 말로 읽히곤 한다.
케이크를 좋아하던 어린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어 이제 건강한 빵을 즐긴다. 크랜베리가 들어간 통밀빵을 바삭하게 구워 버터를 발라 먹는다. 'simple is the best '라고 했던가.
화려한 단맛은 없지만 담백함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끔 이런 게 어른의 맛이고 어른의 깨달음 같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