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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손

by 날갯짓


헤어진 지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를 잡을 용기는 애초에 없었다. 걸리적거리게 매달릴수록 그만큼 멀어질 것만 같았다. 차분하게, 꾹 참고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심지어 그가 영영 나를 잊어버릴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심지어 내가 그를 쉽게 놓았다고 생각할 것만 같아 걱정되기까지 했다. 그렇게 두어서는 안 된다. 희미해지기 전에 나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다급해진 나는 생각보다 쉽게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나의 걱정은 기우였음을. 그는 나를 이미 저만치 밀어놓은 후였다. 이미 목소리만으로도 모든 게 느껴졌다. 함께 했던 시절이 몇 년인가. 눈치가 너무 빤해서 그조차 당황스러웠다. 어쨌든 약속에는 성공을 했고 우리는 그렇게 재회를 했다.


엉거주춤 어색하게 앉아 그간의 일상을 무색하게 나눴다. 심지어 가족들 안부까지 나누기까지 했다. 하고 싶은 말은 하나도 꺼내지도 못하고 그 주위만 어슬렁거리기만 했다. 변죽 울리기만 여러 차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생글거리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긴장을 머금어서 얼굴 모양이 고르질 못하다는 것을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사실 더 이상 나눌 이야기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설득의 방법은 딱 하나. 너의 미련을 끌어올리는 최후의 수단.

마주 앉은 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소심하게 잡았다 해도 사실 나는 안간힘, 온 마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를 손에 담았던 것 같다.


'우리 좋았잖아'

치졸하고 추접스럽게 느껴졌다. 사랑을 전하고자 했던 마음이 결국 스스로에 대한 환멸로 변질됐다. 나는 그 걸로 붙잡으려 했다.


그때 문득 최승자 시인의 시구가 재현되었다. 하필 내가 좋아하던 시의 문장이 현실이 되다니. 이 날을 위해 외워두었나.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에게서 전해지는 쓸쓸함은 온통 내 손가락을 통해 가슴까지 전해졌고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아차 싶었다.


순식간에 폐허에 들어앉았다. 그가 있어 따뜻했던 겨울이, 털목도리와 두텁고 폭신했던 패딩 같았던 시간이 새파랗게 얼어버렸다. 저온 화상을 입은 듯 놀란 나는 그의 손을 밀어놓았다. 그 또한 주저하지는 않았다. 무뚝뚝한 그는 그저 이별 예의를 차리는 중이었고 나에게는 그의 틈을 비집고 들어설 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그날이 있어서 우리는 어찌 됐든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엽고 가여운 나의 연애사. 사실 너도 언제 전했을지 몰랐을 쓸쓸함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언제 아물었는지도 모르게 오래도록 전전긍긍했던 날들이 이어졌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슬며시 봄이 찾아와 녹아내렸던 것 같다. 그 사이에 혼자 고요해지는 시간을 찾아 여기저기 서성거렸고 그 시간은 나를 가볍게 지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혼자 견디는 시간은 결코 무익하진 않았다.


폭풍처럼 우박처럼 한파처럼 어느 계절처럼 지나간 그 시절 어느 시점에, 스스로도 정확히 정의 내리지 못하지만 분명히 있었을 '가여운 평화'가 스르르 내려오는 순간들이 있었을 테니. 그 평화를 안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을 스물여덟의 나를 기억해 보며 살포시 웃어본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다시 시를 써보겠다고 깔짝대는 내게 세 개의 문장이 왔다.

시인 선생님의 사랑스러운 글씨

에세이 창작 수업에서 선생님께서는 최승자 시인의 시집에서 골라낸 몇 개의 문장으로 에세이를 써보라는 과제를 주셨다. 수업에 들어가지 못한 나는 다른 분의 과제를 슬쩍하여 글쓰기를 해보자 다짐했다. 의지박약인 나는 숙제가 주는 힘을 믿는 수동적인 인간이므로.


문장을 받자마자 반가움과 동시에 생각보다 마음이 묵직해져 글로 옮겨 적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어찌 됐든 실행에 옮겼다.


그때 나의 열손가락에 걸렸던 존재의 쓸쓸함은 지금 나의 어느 부분에 걸터앉아 있으려나. 오랫동안 나를 외롭게 했을 테고 그 외로움 안에서 나는 또 나도 모르게 혼자인 시간을 즐기기도 했을 것이다. 또 나를 응시하기도 하고 보살피기도 버려두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알아갔겠지. 그때 만난 쓸쓸함이 내게서 가볍게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었을 테니 그 또한 고마울 뿐.



최승자시인,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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