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몇 시일까
궁금해하기가 무섭게 알람이 울린다.
새벽 5시 30분. 수영장 갈 시간이다. 평소 늦은 밤에 꼼지락대는 걸 좋아해서 늘 아침잠이 부족한 나였는데 이제 그 시간이 되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정신은 깨어있다.
제법 적응했다. 수영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는 사무실에서 꾸벅꾸벅 졸기 일수였는데 이제 그런 일은 없으니.
5월부터 시작된 수린이의 삶이 차곡차곡 무르익어 어느덧 초급 두 개 반중 상급레인으로 옮기게 되었다. 레인을 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중급으로 승급한 것도 아니면서 초급 안에서의 레인 상승의 기쁨은 그것도 다른 물에서 노는 거라며 하루 이틀정도는 어깨 뽕 들어간 느낌으로 둥둥 날아다녔다.
물에 얼굴도 못 집어넣을 때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일취월장이지.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자유형으로 25m 레인을 쉬지 않고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물을 한 컵씩 벌컥벌컥 들이마셔서 아, 이렇게 락스물을 먹어도 되나 싶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느닷없이 물먹는 일이 거의 없으니 이 또한 감사하지 아니한가?
요새는 평영과 접영 연습이 한창이다. 물론 평영은 세상에서 제일 느린 속도로 나아가고 있으며, 접영은 나무토막 같은 내 몸뚱이를 느낄 수 있는 웨이브 연습 중이다. 바닥 좀 짚어야겠는데 평영 연습 때는 사정없이 가라앉더니, 심지어 내 등 위로도 다음 사람이 지나가서 부딪히기도 했건만 이제 수영장 바닥 좀 만져보겠다고, 웨이브 하며 가라앉겠다고 마음먹고 먹어도 바닥이 왜 이렇게 멀리만 보이는지. 손에 닿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이 정도로 뻣뻣했었나.
속도는 늘 저속이어서 뒤에서 날 따라잡아 내 발을 건드리면 다급히 일어나 '먼저 가세요'라고 말한다. 한 시간에 다섯 번은 기본.
한 블록을 건너가기가 이렇게 힘든가. 계속 제자리 발차기만 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꼴찌는 아니었는데, 체력이 부족한지 연습이 부족했는지 어쩌다 보니 다시 꼴찌가 되어서 어느 때는 앞서 한 바퀴를 끝낸 1등 바로 앞에서 물과의 싸움, 고군분투 중이기도 하다. 1등이 보면 앞에서 꼬물꼬물 올챙이 한마리 같아 웃기겠다. 그래도 얼핏 보면 1등으로.오해할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웃는다.
이제 꼴찌는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다. 나이가 들어서 생긴 좋은 점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것. 나는 나대로 연습하면 된다. 어떤 포지션에도 조급해하지 않을 것. 앞으로 더 나아질 일만 남아있지 않은가?
어릴 때 달리기 꼴찌 하면 얼마나 창피했는지 며칠이 지나고도 그 달리기 장면이 떠나질 않아 화끈거리고 부끄러웠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의 꼴찌는
뭐 어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운동.
점수매기는 것도 아닌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하면 되지.
꾸준하게만 하자.
욕심 내려놓고 주어진 삶을 즐기자.
평영 개구리 발차기가 나를 주춤하게 만든 건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다리를 뻗어 물을 밀어낼 수 있을까. 다리킥을 먼저 해야 하나. 유선형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w 만들기, 발목 꺾기, 빠르게 스트로크...
추진력은 또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어느 날은 강사분이 매트로 올라오라고 하셔서 평영 발차기를 시켰는데 혼자라서 그런지 수영장에서 강습받는 사람들이 모두 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홍당무가 되어버렸지만 이 또한 지나고 나니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는 사람들도 아닌데 뭘. 나한테 누가 그렇게 관심이 있다고. 다들 열심히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고 있을 텐데.
40대 중반 아줌마는 이제 과감하다. 원피스 수영복이 부끄럽지 않고 탈의실도 부끄럽지 않다. 엄마랑 목욕탕도 못 가던 나였는데 참 많이 변했다.
또 꼼꼼하지 못해 준비물을 잘 챙기지 못하는 편인데
어떤 날은 수건을 안 가져와서 있는 힘껏 탈탈 털어내고 머리카락도 빨래 짜듯 돌려 짜서 묶고는 물이 떨어지기 전에 후다닥 옷 입고 나온 적도 있고
어떤 날은 수경을 놓고 가서 청소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분실물 오래된 것(보관기간 경과) 수경 좀 빌려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고
어떤 날은 수영복을 놓고 가서 다시 집에 다녀온 적도 있다.
정말 정신없는 삶이다. 예전에는 이런 내가 한없이 싫었지만 예민함을 내려놓고 그럴 수도 있지, 실수할 수도 있지 스스로를 묶어놓은 나만의 계획과 남들의 시선이 담긴 줄을 몽땅 풀어놓고 좀 쉽게 대처를 하기도 한다.
그저 월화수목금토 매일 수영을 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내 몸이 그래도 조금씩 적응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좀 더 건강한 나를, 좀 더 밝은 나를 마주할 수 있는 느낌에 먼저 집중을 하고 거기에 성취감과 즐거움을 더하자는 마음을 다짐해 본다. 물론 조급함 내려놓기는 필수.
혹시 또 모르지. 지금의 내게 생각지도 않았던 수영이 다가온 것처럼 앞으로의 내게, 또 다른 무엇이 또 한 번 매력적으로 다가올지.
미래의 내가 어떤 일상으로 살아갈지 루틴을 생각하면 다소 궁금하기도 한데 앞으로의 시간을 차곡차곡 채워가며 궁금함에 즐거움을 입힌 채 좀 더 나은 삶을 꿈꿔야겠다. 그저 미래의 내게 어느날 다가온 그 어떤 무언가가 내 앞에 짠 ㅡ 나타났을때 한번 더 용기 낼 수 있기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