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바탕화면에는 ‘쿠폰’이라는 앨범이 홈화면의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각종 이벤트에 응모하고 내 개인정보와 맞바꾼 다양한 모바일 금액권들의 바코드를 캡처해 둔 앨범이다. 응모도 열심히 하고 캡처도 열심히 한 것치고는 다시 잘 챙겨보지는 않는다. 잡은 물고기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심보인가.
그래도 기한 지나 못쓰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기에 써야 할 것이 있나 가끔 열어보긴 하는데 그날따라 등골이 서늘하다. 초록빛 로고에 머리 긴 여자가 자기를 자세히 봐달라며 날 째려보는 거 같다. 뭔가 홀린 듯 그 여자를 클릭하니 그제야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유효기간 : 202X. 6. 18 ~ 202X. 8. 18’
18.. 18일이 언제인가? 18. 아 오늘이네. 8월 18일 저녁 8시. 쿵쾅쿵쾅. 이건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눈알을 굴려 집안 상황을 둘러보며 두뇌를 풀가동한다. 더운 여름밤이지만 종일 돌아간 에어컨 덕에 쌀랑한 공기가 가득 차 있고 조직원들은 각자 저녁 식사 후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째려보고 있다. 설거지통을. 문제집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저녁이군.
좋아. 내 이 쿠폰으로 나의 조직원들에게 자그마한 추억을 선물해야겠다.
각자 방에 들어가 있는 나의 조직원들을 불러본다. 그냥 산책 가자고 하면 분명 들은 체도 안 할 것을 알기에 달콤한 말로 거절하지 못할 한마디를 먼저 날린다.
“별다방 가서 음료수 사 먹자. 산책도 하고."
별다방. 누군가에겐 도장을 모아 선물을 받을 만큼 자주 가는 곳일지 몰라도 나에겐 목말라 죽기 직전에 이곳만 보인다면 모를까 내 돈 주고는 잘 안 가는 곳이다. 커피 맛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솔직히 내 기준에선 음료수치곤 비싸게 느껴졌다. ‘그돈이면..’이라는 남들이 듣기에 촌스러울 수 있는 생각은 별 부끄럼 없이 내 의식 전반에 깔려있었다.
그 정도로 친근하지 않은 곳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앱테크를 시작하니 ‘쿠폰’ 폴더의 절반이상은 초록빛 여자로 채워져 있다. 커피 맛 때문인지 브랜드 인지도 때문인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별다방의 수요는 항상 많고 이벤트사에선 참여율을 높이기 쉬우니 낚시용 쿠폰으로는 항상 부동의 1위이다.
날 보고 자란 아이들도 카페라는 곳에서 플라스틱 컵에 담긴 음료수를 먹어본 경험이 있을 턱이 있나. 그런데 어머니께서 황공하옵게도 친히 그곳을 가자하시니 아니 일어날 수가 있나. 게다가 숙제를 해야 할 시간인데 합법적으로 놀 수 있는 시간으로 바뀌었으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나 싶다.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마친다. 어머니께서힘드셔서 마음이 바뀌실까 싶어 막내 여동생의 신발도 직접 신겨주고 손도 냅다 잡는다. 사춘기 모드는 일시정지.
한가득 쌓인 저녁 설거지는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한 여름밤의 가족 산책(feat. 별다방 쿠폰 털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약간은 습하고 텁텁한 바람. 저녁 손님들로 붐비는 식당의 소음과 간판의 조명들. 그중 가장 좋은 건 걸어가는 내 아이들의 모습이지. 엄마보다 커진 키로 막내 동생을 무등 태우고 걸어가는 든든한 첫째의 뒤태. 이때가 기회다 싶어 내 옆에 붙어서 종알대는 귀여운 둘째의 오동통한 손. 다섯 발자국 뒤에서도 들리는 오빠 어깨에서 신난 막내의 웃음소리. 뒤에서 따라오는 남편도 그날따라 보디가드처럼 듬직하게 느껴진다. 별다방까지 가는 15분의 시간이 못내 아쉽다.
아차.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앱으로 미리 주문을 해두고 빠르게 찾아야 한다. 별다방의 이 주문 시스템은 가히 최고라고 박수 쳐주고 싶다. 대면으로 주문하면서 한 장 한 장 앨범을 손가락으로 넘겨가며 찍어야 할 바코드를 대여섯 개 정도 보여주는 5분 남짓의 시간은 누가 뭐라 하지 않지만 괜히 불편하기도 하고 이 행복의 흐름을 끊을 것 같았다. 부끄럼쟁이 짠순이 아줌마에겐 참 고마운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망고바나나, 초콜릿프라푸치노, 딸기요거트, 자몽허니티.
난 딸내미랑 같이 먹으면 되니까 내가 좋아하는 캐러멜마키아또는 일단 다음 기회로 미룬다.
스마트한 어머니는 별다방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준비된 알록달록한 4잔의 음료를 자연스럽게 들고 나온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프로젝트의 완성이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어머니는 여러 곳에 개인정보를 상납하시고 새벽까지 눈꺼풀을 꿈벅여가면서 손가락을 놀리셨으며 원활한 음료 픽업을 위해 철저한 시간 계산까지 하셨다는 걸 조직원들은 모르겠지.
몰라도 된다.
나의 조직원들이 해맑게 웃는 저녁이 그저 작아 보이지만 나에겐 큰 행복이다.
이번 프로젝트로 초록 쿠폰은 탕진했지만 그 여름밤의 별다방 추억은 우리 가족의 여름 시그니처 메뉴로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