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점수지? 내 점수냐?', '꼴랑 수행평가 가지고 해 주긴 뭘 해줘?', '다 맞기나 하고서는 얘기해라.'
간신이 목구멍으로 비집고 나오려는 걸 꾹꾹 눌러놓고 다정한 관찰자 모드 스위치를 ON.
"뭐 해줬으면 좋겠는데?"라고 물으면서 머릿속은 복잡하다. 성적은 외적보상이 아니라 자기 성취감 같은 내적보상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고 많은 전문가 분들이 말씀하셨는데 내 현실에는 왜 적용이 안 되는 것인가? 요즘 애들 부족한 게 없어서 점점 더 큰 물질적 보상을 원한다는데 과한 걸 원하면 어쩌나. 나 또 뭐 잘못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이틀 공부 밀렸던 거 그것 좀 까줘."
복잡한 내 머릿속 사정은 모른 체 사춘기 스위치 OFF 한 아이는 천진스럽게 말한다.
내가 아이를 과대평가했나 싶어 아이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세상 쿨한 엄마모드로 "오케이"를 외쳤다.
까긴 멀 까 귤이냐. 그 밀린 공부는 어차피 못할 것 같은데 그 정도 보상쯤이야. 근데 네가 다 맞겠냐. 아이고. 내 아들 키만 컸지 아직 어리네. 귀여운 놈.
"흐흐흐, 엄마 근데 나 수행 이미 봤어. 만점이야."
어라? 뭐라고? 이런 새의 자식을 봤나.
어안이 벙벙한 어미의 낯빛을 보면서 분위기 파악은 날려버리고 신나게 떠든다. 고득점은 많은데 만점은 별로 없네. 문법 쓰기랑 발표랑 합쳐서 본 건데 다 만점이라네. 학원 다니는 애들보다 내가 더 잘 봤다는 둥. 애들이 자기 보고 공부 안 하는 것 같은데 왜 시험은 잘 보냐고 했다는 둥. 아주 어깨는 봉산탈춤을 추고 팔다리는 깨발랄하게 동동 거리는 게 일곱 살 때 받아쓰기 첫 백점 맞은 날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 같다.
아니다. 수행 만점보다 자신의 야심 찬 계획으로 마치 손흥민이 70m를 멋지게 드리블해 정확한 슈팅으로 골망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던 그 순간 골키퍼의 얼굴을 엄마의 얼굴에서 또 보는 것 같아 신나 보였다.
맷돌의 손잡이 없는 소리를 들으며 얼빠진정신을 다시 챙겨본다. 다정한 관찰자로 돌아와서 그래도 칭찬해 줄 건 해줘야지 싶다. 다정하지만 뼛속까지 T를 장착한대다 어퍼컷까지 강타당한관찰자는 차마 얼굴 표정까지는 바꾸지 못하고 간신히 칭찬의 말을 하나 끄집어낸다.
"대. 단. 하. 네. 우리 아들."
누가 봐도 영혼 없는 리액션이었을 텐데. 흥분의 도가니탕을 끓이시는 열네 살은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이 기회를 놓칠 새라 한마디 더 보탠다..
"나 그럼 오늘 공부하고 내일 공부까지 미리 해 놓을 테니까 폰 시간 좀 풀어줘. 나. 나 이렇게 매일매일 다음 날 공부를 전 날 해놓고 폰은 자유롭게 쓸 거야. 엄마가 그랬잖아. 그날 공부 다 끝내면 폰 시간 풀어준다고. 나 엄청 똑똑하지?"
우리 아들 랩하니?
가만 뭐시라?
종합해 보면 영어 수행 만점의 보상은 공부는 하되, 핸드폰은 자유롭게 쓰겠다는 거네.
그렇다. 내가 약속했었다. 하도 그날 공부 할당량을 미루고 미루길래. 공부 다 해야 핸드폰 시간 풀어 줄 거라고. 그렇게까지 약속을 했건만 하루 폰 시간은 3시간을 넘지 않았고 풀어주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잊고 있던 약속인데. 근데 이 약속을 이렇게 활용한다고. 누가 토끼띠 아니랄까 봐 영악한 토끼 같은내 새끼.
그리하여 이 토끼 자식은 주말 동안 핸드폰을 아주 당당하게 프리하게 쓰셨다는 후기가 남았는데.
이렇게 끝나면 이 글을 보시는 핸드폰과 전쟁 중인 사춘기 어머님들께 아주 퍽퍽한 고구마와 걱정 한보따리를선사했을 것을.
일요일.
녀석의 야심 찬 계획 대로라면 월요일치 공부를 미리 해야 할 아이가 저녁이 다 되도록 침대에 누워 핸드폰과 합체한 누에고치로 변신했다.
너의 야심 찬 계획은 이일천하로 끝날 것 같은 엄마의 슬프고도 기막힌 예감을적절한 은유와 비유법을 사용하여 A4 한 페이지 분량으로 서술하여라. 이 수행을 만점을 받으면 영원히 폰을 풀어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