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증언으로는 오빠가 네 살 때 개구리장화를 신고 네발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온 마을을 구경시켜 준 참 다정한 오빠였다는데 아쉽게도 내가 기억하는 오빠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였을까? 나는 심부름을 할 때마다 용돈으로 받은 500원짜리 동전을 아주 소중히 여겨서 원통모양 철 필통에 넣어 잘 숨겨두었는데 며칠 후에 열어보니 10원짜리 동전만 가득 들어있어서 무지 화가 났던 일이 있었다.
반찬도 맛있는 걸 먹으려고 서로 싸우니까 엄마가 나눠서 주시면 나는 맛있는 건 아껴먹으려고 맛없는 것부터 먹고 있으면 꼭 오빠는 자기 맛있는 걸 다 먹고 내 걸 뺏어먹어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게 했다.
그럴 때면 억울해서 덤벼들다가 된통 두들겨 맞곤 했다. 어릴 때는 오빠한테 하도 맞아서 제발 저놈의 오빠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라고 달라진 건 없었다. 오빠는 그 시절 유행하던 날라리의 표본이었다. 바지통은 얼마나 줄여 입었는지 교복 바지는 쫄바지처럼 보였고, 머리는 2대 8 가르마에 왁스로 쫘악 붙이고 작아빠진 책가방에 줄은 또 얼마나 조여 맸는지 꼭 거북이 등껍질 마냥 등에 딱 붙이고 다녔다.그에 비하면 나는 못생긴 모범생이었다.
어느 날 등굣길에 집에서 따로 출발했다가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나 우리는 서로가 부끄러워서 같은 칸에 앉아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 타고 가기도 했다.
공부도 지지리 안 했던 오빠는 매일 저녁 거하게 술을 드신 아빠의 안주거리였고, 그 모습을 타산지석 삼아 나는 더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 사이에도 조금의 변화가 찾아온 계기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오빠의 군 입대였다.
나도 마침 천안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어 우리 가족은 각자 대구, 천안, 대전에서 흩어져 이산가족으로 살다가 한 달에 한 번 대전에서 군복무를 하는 오빠를 면회하며 상봉하곤 했다.
어느 날 외출을 받아 노래방에 가서 다 같이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수첩을 꺼내 뭔가 열심히 적고 있는 오빠가 뭘 하나 싶었는데 노래방을 나올 때 부모님께 감사편지를 전달하는 진기한 장면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땐 군대가 참 사람을 많이 변화시키는구나 싶었는데 제대하니 별반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삶의 방식대로, 오빠는 오빠의 삶의 방식대로 서로 고군분투하며 살다 보니 어느덧 우리도 서른 후반이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우린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가끔 오빠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
사실 나는 그런 오빠의 전화도 부담스러웠다. 어렸을 때 맨날 못생겼다고 놀리고 많이 싸우고 원수처럼 지냈는데 그때의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져 있는지 갑자기 친한 척하는 게 영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오빠는 전화로 자주 “잘 살아줘서 고맙다” 고 했다. “내가 오빠한테 도와주는 것도 없는데 오빠가 왜 고맙냐?”라고 물으면 “잘 살아주는 게 도와주는 거다”라고 했었는데 그땐 그 말의 뜻을 잘 몰랐다.
그나마 올해는 내가 육아휴직을 한 연유로 얼굴을 자주 봤다. 울진에 살고 있는 내가 대구 친정에 간다고 하면 오빠는 꼭 나를 만나러 왔다.
오빠는 이혼하고 한참 못 만난 중학생 아들이 보고 싶은지 우리 아들을 데리고 둘이 나가서 햄버거도 사주고 시장 구경도 시켜주곤 했다. 지난여름에는 오빠가 울진에 잠깐 놀러 와서 우리 집도 구경하고 갔었다.
그런 오빠가 이젠 하늘나라에 있다.
이렇게 좋은 기억만 다시 만들어 놓고 홀연히 떠나버린 오빠…
너무 급작스러운 이별에 나에겐 아쉬움만 한가득 남았다.
내가 먼저 한 번이라도 연락해 줄 걸 그걸 한번 못하게 참 가슴이 아프다.
나는 사실 결혼과 동시에 친정에 소홀했다. 아니 오빠가 그동안 불효를 저질렀으니 효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떠나보내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무거운 짐을 혼자 다 짊어지고 있었을까 같이 나눠 짊어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해졌다.
장례를 치르면서 또 한 번 놀랐다. 부모님께는 매 주말마다 찾아뵙고 선물도 잘 사드리고 효도하는 건 알았지만, 친척들과 회사 사람들에게도 두루두루 싹싹하게 잘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
장례식장에서 오빠를 그리워하며 슬피 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오빠에게 참 고마웠다. 그리고 그 모습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마흔… 이렇게 훌쩍 떠나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지만, 사는 동안 참 많은 사랑을 베풀고 또 받으며 갔구나 싶어 안도하게 되었다.
오빠야~ 하늘나라에서는 이제 엄마 아빠 걱정 말고 편하게 지내. 내가 잘 챙길게.
우리다시 만나면 그땐 더 사이좋게 지내자. 내 생이 다 하는 날까지 오빠 몫까지 더 열심히 살게.
고맙고 또 사랑해.
이 글은 1년 전에 쓴 글이다. 오빠를 보내고 한 달 후에 맞이한 오빠의 생일에 마음속으로 띄우는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