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오늘은 살아봐요!
변우석을! 위하여!
뒷 테이블의 건배사가 들려와 깜짝 놀랐다. "변우석을!" "위하여~!"
여기저기서 깔깔 거리며 같이 웃는다! 여기서는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웃어도 된다.
여기저기 채운 테이블들. 팬들의 톡방 모임일까,
힐끔 쳐다보고 들어보니 고3 수험생 딸이 있는데 일본 팬미팅을 다녀왔다는 엄마, 또 갓 스무 살을 넘었을까, 아니 더 어려 보이는 학생. 숨 가쁜 숨소리와 함께 미취학 아이들을 (어디 맡길 곳이 없었던 것 같다)
같이 데리고 나온 엄마가 한 테이블에 모인 것이다. 이 모습을 보니 이것이 진정 세대 통합이 아닌가 싶었다.
나이 불문하고 한 사람의 팬으로서, 세상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의 별이 된 스타의 덕질을 얘기하며, 좋은 건 같이 나눠야 한다며 굿즈를 나누고 있다.
낯설고 신기한 이곳은 벽이며 계단의 난간이며 온통 팬들이 가져다 놓은 포카(포토카드)며, 포스터, 굿즈들로 빼곡히 도배가 되어있다.
와~ 나는 누구? 어디에?
그렇다,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익선동 맛집 "노란 대문" 우석 씨 작은아버지 가게이다.
"선재 업고 튀어 봤어? 그때 우리 감성이 터지는데! 옛날 생각나더라."
'배우들은 누군지도 모르겠고 또 뻔한 그런 로맨스 아닌가?'
그래도 친구들이 재미있다던데 한번 볼까 하며 시청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빠지지 않으리 하는 삐딱함과 오기심을 갖고 무심한 척 보려고 했으나, 아, 내가 그 매력을 어찌 거부하겠나. 단숨에 몰아 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 우석 씨를 보며 근래 보기 드문 미소를 장착한 체 관련된 영상을 하나둘씩 섭렵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ott로 한 드라마나 또는 예능을 몰아서 보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이며, 나 역시 누군가 재미있다고 하면 뒤늦게 몰아서 보았다. 그러다 보니 몇 시간씩 훅 지나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거나, 혹은 오전에 몰아 보다가 애들 데리러 갈 때 정신없이 뛰어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몰입하는 순간 일상이 무너지는, 이것도 저것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솔직히 나는 어딘가에 빠지는 게 무서웠던 거다.
티모시 샬라메에 빠져 영화관도 일반, 아이맥스, 풀스크린을 소화가능한 아이맥스에 따라 다르다며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관람하러 타 지역을 넘나드는 K.
당시 내한의 한 터라 무대인사에 갈까 말까 망설이며 설렘으로 가득한 얼굴. 그가 어떠한 가족 환경을 가졌으며, 영화를 위해 아이비리그를 중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긴 무명의 시기를 극복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매력을 가졌는지에 줄줄 설명한다.
이준호에게 빠져 같은 콘서트도 그날그날의 맨트와 완성도가 다르다며 티켓팅에 온 전력을 쏟는다. 높은 운동화를 신고 스탠딩석에 얼굴 한번 가까이 보겠다고 들이밀다가 발톱에 피멍이 드는 A.
버블(스타와 DM을 주고받는 팬플랫폼)은 기본이고 인스타로는 만족이 안된다며, 발 빠른 최신정보를 위해 트위터를 체크한다.
변우석에게 빠져 위버스(버블과 같은 팬플랫폼)와 24시간 끊임없이 이야기 꽃이 피는 팬 단톡방뿐만 아니라, 그가 나온 드라마, 예능에 나왔던 장소를 탐방하며 그의 발자취를 수집하는 S.
굿즈로는 부족하여 그가 광고한 비빔면이 출시되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한 박스, 팬사인회 응모를 위해 남성 스타일링 제품도 괜찮다며 다슈 구매를, 이왕 쓰는 치약은 유시몰, 수분크림은 피지오겔, 의자도 바꿀 때가 돼서 일룸, 더울 땐 베라에서 아이스크림과 사전예약을 통해서만 받는 변우석의 담요를 산다.
그녀를 보면서 차나, 아파트광고를 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변우석의 그녀 S 덕분에 나도 위버스를 결제하며 스타와 DM을 주고받는 세계를 알게 되었고, 그녀를 따라 서울 곳곳 핫한 플레이스를 다니며 MZ세대가 된 마냥 기분에 취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들은 왜 이렇게 가슴 뛰는 덕질을 하게 되었을까? 궁금하기 시작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만 들려도 설레는 앳된 여고생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도는 한량도 아니고, 그 누구보다 가정, 육아, 직장에서 치열하게 희생이라고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던 친구들이었기에 더 놀라웠다.
또 쏟아부을 에너지가 남아 있었는가? 원더우먼도 아니고 어떻게 열정이 저렇게 넘칠 수 있을까.
그녀들의 덕질이 시작이 되었을 때 시기와 사정은 달랐으나, 그녀들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 그쯤이었던 거 같다.
물 밀듯이 떠밀려 오는 일과 모르는 척 외면하는 이기적인 사람들 속에 외롭게 서 있었고.
육체적으로 힘들어 무너지는데, 의지하고 기대고 싶은 가족마저 외면하는 허망한 상황 속에 놓여 있었으며,
부모와 자식이라는 끊을 수 없는 관계 속에, 이러다 내가 죽겠다 싶어 도망친 현실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 그녀들을 붙잡아 주는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한줄기 빛.
그러니까 오늘은 살아봐요!
날이 너무 좋으니까. 내일은 비가 온대요.
그럼 비가 그치길 기다리면서 또 살아봐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사는 게
괜찮아질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여주인공 임솔은 사고로 병실에 누워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세상이 준 벌처럼 느껴져 도저히 살고 싶지 않은 그 순간, 전화기 너머로 선재가 말을 건넨다.
"그러니까 오늘은 살아봐요!"
원망, 분노, 슬픔, 자책, 미움, 고통, 모욕, 실망, 우울, 좌절, 증오, 허탈 그 어딘가에 서있는 그녀들.
한 사람 한 사람 삶과 고통의 무게는 모두 다르다. 그 무게에 짓눌려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현실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타인이 그 고통을 어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들이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위로랍시고 건네는 어설픈 조언 따위는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일상과는 먼 세계의 스타들.
그들은 너와 나 서로 고통의 무게를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웃음, 노력, 성공은 희망이 되는 존재가 아닐까. 그녀들은 덕질을 통해 현실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고, 몰입의 열정으로 고난을 견뎌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 내고 싶어서, 그렇게 애쓰는 것 아닐까.
나는 그녀들이 덕질이든 무엇이든, 그 열정을 놓지 않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열정마저 놓아 버린다면, 한 없는 깊은 무기력과 우울에 침몰당할지 않을까 마음이 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