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등교하고 집안일을 마무리하고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무려 카페 알림이 30개가 넘었다. 무슨 일 있나 들어가서 확인했더니 동네 학부모 카페이다.
'이 차 보세요. 드롭존을 넘어서서 인도에 세워놓고는 아이를 정문까지 데려다주네요.'
'신고하세요, 신고가 답이에요.'
'금융치료가 답입니다. 신고하세요. 방법은.'
댓글은 금세 여러 가지 신고 방법들의 글과 사진으로 게시된다. 그리고는 신고했어요,라는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매일 등하교시간마다 학교 정, 후문에 주차해 놓은 차량들 때문에 카페가 소란이었다. 그래서 각자 학교와 동사무소에 민원을 넣었다. 그 후에 정문 앞에 드롭존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롭존에 주차하는 차, 드롭존에 자리가 없자 인도에 주차하는 차들을 손가락질하며 민원을 넣는 중이다. 학교와 동사무소 그리고 경찰서에.
물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규칙을 지키지 않은 차량들을 옹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지나가다가 횡단보도 정지선을 넘어서 정차한 차를 보면, 눈이 찢어질 정도로 째려보는 것도 나란 사람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자 함은. 규칙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민원이 아니라. '민원'의 접근성에 대한 육지 이야기다.
▲ 어느 학교 운동장
새 학기가 되어 찬란한 햇살이 운동장을 비치는데도 학교 운동장에는 개미 한 마리 조차 보이지 않는다. 우리 집 부엌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학교 운동장이 보이기에 한 번씩 슬쩍 내다본다. 아이들이 뭐 하면서 노나 싶어서. 그런데도 점심시간조차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지잉잉. 폰을 들여다보니 카페 알림이다. 클릭하니 또 댓글이 수없이 달리고 있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오늘 미세먼지 심하죠. 다들 마스크 써서 보냈나요.'
'어떤 아이는 콜록콜록하면서 학교 가던데. 어디 아픈 건 아니겠죠. 마스크 쓰면 서로 좋을 텐데.'
'학교에서 마스크 쓰고 등원하라고 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한테 건의해 볼까요.'
'아까 후문 쪽 중정에서 아이들 피구하고 있던데 이런 날은 바깥 활동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 이래서 아이들이 운동장에 못 나오고 있구나. 하루종일 교실에만 있으면 답답할 텐데. 마스크가 의무인 코로나19가 진작에 끝났지만 아이들은 북적북적 교실에만 갇혀 있다.
하교 후 돌아온 아들에게 오늘 어땠어, 점심시간에 뭐 했어, 운동장 가서 놀았어, 등의 질문을 퍼부었다. 새 학기라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
"오전에 다른 반 친구들이 운동장에서 놀았는데, 학교로 학부모들이 항의 전화 했대요. 미세먼지 있는데 밖에서 노냐고. 그래서 오늘 선생님께서 운동장에서 놀지 말래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지. 미세먼지 몸에 안 좋지. 약간 나쁨이지만 어쨌든 미세먼지 안 좋지. 아이들이 이제 마스크 없이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미세먼지는 다르지. 미세먼지 마실 바에 교실에 있는 게 낫지. 여태껏 미세먼지 나빠도 학교에서 공지 오지 않는 한, 마스크 써서 보내지 않은 무심한 엄마는 나뿐이지.
그래도 바깥공기 조금 쐬는 것도 좋지 않을까. 교실 안에도 먼지로 인한 미세먼지 나쁨일 텐데. 그러고 보니 아까 카페 글에서 학부모들이 교실에 있는 공기청정기의 유무 및 성능, 켜는 시간 등에 대해 얘기하다 결국 학교에 여러 차례 문의 전화를 했다는 게 생각났다.
▲ 출처 : pexels. Lara Jameson 메가폰 든 사람
어디 이뿐이랴.
오래간만에 운동장에서 스피커 소리가 들린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모여 체육대회를 하는 것 같다. 마이크 잡은 분의 말투가 레크리에이션 강사 같기도 하고. 운동장 한편에는 빅볼도 보인다. 어느 반이 체육대회를 하나 보다. 진행 말씀 중간중간에 요즘 유행하는 가요도 흘러나온다. 운동회인가. 모래바람 흩날리던 운동회. 먹을 것 잔치였던 운동회.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는 운동회는 저 멀리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코로나19로 잠식했던 활동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마음이 두근두근거리고 설레기 시작한다.
사실 큰 아이가 입학할 때 코로나19가 시작되어 입학식이며 소풍이며 체육대회며 모든 것이 사라진 해였다. 그러다가 3년이 지난해에 조금씩 풀리면서 근교의 소풍, 반 대항 체육대회가 열려 아이들이 학교의 다양한 활동에 적응하던 차였다. 이제 아이들이 제대로 만끽하며 놀 수 있겠구나.
지잉잉. 카페 알림이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행사하나요.'
'6학년이 체육대회 하나 봐요.'
'오랜만에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노니까 즐거운 것 같아 좋아 보이네요.'
'날씨도 춥지 않아 다행이에요.'
'지나가다 보니 정문에 경찰차가 서 있어요. 무슨 일 있나요?'
'누가 신고했대요. 운동장에서 시끄럽다고. 그래서 경찰서에서 왔나 봐요.'
'아니 그런 걸 누가 신고해요. 경찰서는 또 그런 신고를 받고 오나요? 어느 관할이죠?'
'학교로 문의할게요.'
'그 경찰서에 민원 넣어야겠어요. 받을 신고가 있고 당당히 거절할 신고가 있지.'
아. 마이크 소리가 사라졌다. 다시 내다보니 아이들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체육관에서 하려나. 오늘은 모처럼 미세먼지도 없는 쾌청한 날씨인데.
육지에 와서 처음 맞닥뜨린 학부모의 정체는 이러하다. 신고의 학부모. 민원의 학부모.
어쩜 이렇게 다들 부지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동네 및 학교 그리고 학원(여하튼 아이들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모든 생활영역)의 모든 것의 정보를 섭렵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세세히 다 파악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누가 학교에서 무슨 활동을 하고 운동장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서 신고하냐 싶으면 우리 집 같이 운동장을 훤히 보고 있는 학부모일 테다. 누가 동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서 신고하냐 싶으면 그 당사자 학부모일 테다. 누가 학원에서 어떤 상황이 생겼는지 알고서 신고하냐 싶으면 그 옆 친구 학부모일 테다. 짐작하건대.
전화하는 게 그렇게 쉬운 건가. 전화통화는 내가 가장 꺼려하는 것인데. 전화번호는 어찌 그리 잘 알까. 학교 교무실 전화번호. 교육청 담당 장학사 전화번호. 동사무소 담당자 전화번호. 구청 담당자 전화번호. 경찰서 담당자 전화번호. 이 수많은 전화번호를 어떻게 찾아내어 글을 올리며. 민원을 독려하고. 또 그 글을 확인한 사람들은 어찌 그리 부지런하게도 민원을 넣는다 말인가.
전화하는 게 어려우세요. 그럼 이 링크 타고 민원의 글 쓰세요. 민원 글은 이렇게 쓰시면 됩니다. 뭐가 이래서 이렇고, 뭐가 그래서 그렇고. 예시까지 상세히 써서 알려준다.
그 해 한 초등학교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 상황이 어찌 됐든. 학부모의 악성 민원으로, 젊은 교사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교에서는 학교폭력 가해자를 옹호한 사건이 발생한다. 가해자의 부모가 그 지역의 높은 사람이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멀스멀 넘어간 사건이라 한다. 또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채, 한 지역 초등학교 학급의 여섯 번째 담임교사가 교체됐다는 뉴스도 나왔다. 이 또한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의해서.
그 와중에도 학부모 카페에서는, 여러 사건의 중심에 선 학부모를 향한 손가락질이 멈추지 않는다. 그 학부모는 어느 지역이며, 무슨 직장을 다니며,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이고. 이래저래 수많은 정보들이 넘쳐난다. 그 상황에서 보건대. 이래저래 민원 넣어라, 민원 인증해라, 하는 학부모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과연 무엇이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나.
사실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특이한 학부모가 있듯이 독특한 교사도 있다. 나 또한 아이가 1학년 때 급식실 가는 길에 친구가 밀쳐서 신발장에 머리를 찍혀 피를 줄줄 흘리는데도 담임이 알지 못하고. 그 상태로 급식실 가서 식판에 밥을 받으려는데, 영양사가 보고서야 담임이 상황을 파악하고 연락을 줘서. 내가 급히 학교로 달려가 병원에 가서 상처를 꿰맨 적도 있지만. 그 후에 어떠한 상황이나 다친 상처, 후속조치에 관한 전화, 문자 한 통 선생님께 받지 못했던 적도 있다.
한편으로는 내가 교사로서 한 학부모의 여러 번의 민원으로 교육청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었다. 이유인즉슨 학부모에게 내 스마트폰 전화번호를 공개하지 않은 건으로.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민원을 넣을 상황도, 민원을 받았던 상황이 있던 필자다. 하지만 그때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최선의 대처방법은 먼저 상대편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무조건 옳은 것이요,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처한 상황이 각자 다르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얼마든지 따질 수 있고 항의할 수 있었지만. 극단적인 편견은 버리고, 조금은 그 사이의 틈을 두고. 현명한 판단을 통해 상황을 분별하고 옳게 행동하고자 했다고 위안을 삼는다.
이 모든 것들이 별거 아닌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모두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미혼 전에 교사로서 학생들을 대할 때와 결혼 후에 자식이 생기고 학생들을 대할 때에 마음가짐이 다름을 안다.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내 자식은 어딜 가도 안전하고 이쁨 받으며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단지 학교와 교육청, 학원 혹은 교사에 대한 민원으로서 모든 것이 보장될까. 과연 민원을 통한 항의로서 내 자식이 안전하고 이쁨 받으며 사랑받게 될까. 민원 인증과 민원 전화로 바쁜 엄마를 보며 아이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저출산시대로 아이도 하나밖에 안 낳는 이 시점에. 그 누구보다도 귀한 내 자식의 부모로서. 어떤 것이 아이들을 위한 발걸음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큰소리를 안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박완서 저.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중에서.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와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과 교육기관 등에 대해서. 눈초리와 손가락질보다는. 관심과 응원으로 보탰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 발판이 우리 각 가정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