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때아닌 덕질이다. 덕질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연예인을 보며 설레고 즐거워하며 영상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덕질의 시작이지 않을까. 이 나이에 아이돌을 좋아할 줄 몰랐다. 아니다. 사실 아이돌은 H.O.T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줌마 소리를 듣는 마흔에 나이가 어린 연예인을 좋아하게 될 줄이야. H.O.T 이후 설레게 하는 당사자는 바로 지드래곤이다. 오랜만에 컴백했다고 세상이 떠들썩하다. 빅뱅(지드래곤은 빅뱅이란 그룹의 멤버)이 유명하던 시절, 동생이 빅뱅 CD를 사들이고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건 무슨 노래냐, 저 복장은 왜 저러냐, 왜 인기가 많냐,라고 비웃었었다. 그런 막말을 하던 중에 눈길을 끈 건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 가수 지드래곤이 출연하게 되면서 흥미를 가졌다. 유명하다는 가수가 웃긴 액션을 취하네, 정말 웃기다, 볼 수록 상큼한 매력이 철철 넘친다. 무한도전 속의 그가 친근해진다. 그렇게 H.O.T 해체 이후 한 가수에게 마음이 꽂히고 친근해졌으나, 여러 가지 사건들로 TV에 좀처럼 나오지 않던 그가 2024년이 끝나는 시점에 컴백을 한 것이다.
트로트가수를 덕질하는 어른들을 보며 남얘기라 생각했었다. 웬 아주머니, 할머니 분들이 가수들을 저렇게까지 좋아해,라고 비웃었던 어리석은 생각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방어축제라고 서귀포에 놀러 갔는데 마침 '전국노래자랑' TV 프로그램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은 여성분들이 한 줄로 서서 응원봉을 들고 우리를 앞서서 길을 가로질러가는 것이 아닌가. 유명한 가수가 왔구나, 모르는 팬클럽 색깔인데, 누구지. 그렇다. H.O.T는 흰색, 젝스키스는 노란색 아니던가. 처음 보는 색이었는데 무대 옆에는 큰 관광버스가 몇 대 서 있고, 나이 지긋하신 여성분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서 관람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버스에 달린 이름을 보아하니 '영탁'. 트로트 가수다. 아, 영탁 가수 팬분들이구나. 실로 대단하다. 그들은 똑같은 '코발트블루'(검색해 보니 영탁의 팬덤 색) 티셔츠를 입고 응원봉을 들고 무리를 지어 입장하고 있었다. 팬분들의 말투를 들어본즉 제주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 제주에는 이런 팬덤이 있을 수가 없지. 다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으리라. 육지에서 비행기 타고 제주에 와서는 관광버스를 대여하고 다 같이 가수를 응원하러 온 셈. 와우. 혀를 내둘렀다.
마침 무대에 등장한 가수 영탁. 팬분들의 환호성 소리가 서귀포 앞바다까지 흘러넘치며 영탁의 노랫소리가 하늘 위로 울려 퍼진다. 가수분의 실물을 접한 팬분들은 얼마나 좋을까. 바다를 바라보며 이곳 제주 끝자락까지 노래하러 온 가수는 자신의 팬분들을 보며 얼마나 뿌듯해할까. 연예인과 팬분들의 공감과 애틋한 교류가 이어지는 생생한 현장이다.
이런 모습을 3자의 눈으로 보던 시간도 흘러 이제 슬며시 나이가 들었건만. 화려한 복장을 하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춤을 추고 흥이 나는 노래를 부르는 앳된 가수를 좋아하게 될 줄이야. 단지 이제 H.O.T가 가수 활동을 안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자. 열광하며 응원하던 야구가 비시즌이기 때문이라 여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드래곤이 컴백한 영상은 1200만 뷰가 넘어가고 있고, 이는 그의 팬분들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무심했던 필자와 같은 사람들도 그의 무대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예인을 왜 좋아하냐,라고 묻는다면. 바야흐로 중학교 1학년 때. 중학생이 되어서 닥친 것은 고입 시험. 시험을 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들어가야 하는 것이 목표다. 그 당시 사립학교들은 아침저녁으로 보충 및 자율학습을 하는데, 불행히도 우리 학교는 국립이라 보충·자율 학습이 없어진 해였다. 어찌 보충수업 없이고입 시험을 준비한단 말인가. 앞이 까마득하고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며 초조하던 시절, 그나마 즐거움으로 다가왔던 건 친구들이 소장하고 있던 잡지와 마이마이(카세트테이프)였다. 그 어느 것도 가지지못했지만 몇몇 친구들의 전리품 소유로 슬쩍 연예인에 물들고 있었다.
그때만난 것이 H.O.T 그룹. 입시와 성적에 시달리던 내게 유일한 돌파구였던 그들의 노래 가사들. 마치 세상을 원망하는 듯한 리듬과 가사는, 십 대 소녀가 내면으로 울부짖던마음을 대변하는 듯 화려하고 무질서하며 파격적이었다. 따라 할수 없는 현실에 대리만족이었을지언정. 마음의 이탈이랄까. 벗어날 수 없었던 입시지옥에서 그들이 부르는 '자유'에서 쾌감을 느꼈으리라.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친구들이 갖고 다니던 CD플레이어를 빌려가며 H.O.T 노래를 귀동냥했고. 거대했던 클럽 H.O.T에 소속된 이들이 흘린 정보를 귀담아 들었다. 하나의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그 당시 D대학에 다니던 2명의 멤버가 제주에서 열리는 마라톤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왔던 시점. 그 소식을 사서함으로 접한 팬클럽 아이들이 배가 아프다며 조퇴를 하고 택시를 타서 서귀포까지 갔다는 열정적인 비하인드 이야기. 조퇴조차 용기 내어 할 수 없었던 무늬만 가진 팬은 그저 그들이 H.O.T를 보고 온 생생한 후기만을 애처롭게 들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해체된 그룹 앞에. 모든 이들이 하얀 우비를 입고 학교를 등교하며, 하나밖에 없던 공중전화박스 앞에서 그들이 남긴 사서함을 들을 때. 학교 운동장과 시청까지의 거리 곳곳, 버스 정류장마다 H.O.T 해체를 반대하고 그들을 영원히 기억한다는 글이 적힌 포스터까지도. 뼈아픈 기억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추억으로 남긴 애잔한 스토리다.
무늬만 팬클럽이었지만 그들의 노래로 불같은 사춘기를 견뎌낼 수 있었고. 그들의 무대 모습은 요동치던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만은 멀리 떠나보내던 십 대의 모습을 대변해 주었다. 그들을 생각하며 '나이 들어서 집을 갖게 될 때, 방 하나는 H.O.T 방으로 꾸밀 거야. 벽지를 포스터로 도배하고 그 방에서는 H.O.T 노래만 틀어놓는 거지.'라고 당차게 자부했던 꿈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토록 열정 있게 그네들을 바라보던 마음이 어디 갈 쏘냐. 이번에는 다행히도 트렌드에 맞게(늘 트렌드에 뒷북치는 나로서는) 지드래곤이라는 가수에 열광모드.
그때는 고입, 대입이라는 무거운 책가방만큼이나 답답한 마음으로의 일탈을 꿈꿨다면. 지금은 무엇 때문에 그에게 열광하는가. 그토록 꿈꿨던 대학생활에서도 규칙적인 생활을 어기지 못한 채 착실하게 책상에만 앉아 있었고. 새로운 꿈을 꾸며 긴 시간 공부를 했지만 결국 집에 있는 주부가 되었다. 경력단절 10년 차 주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다지도 애처롭고 나약하며 미약할 뿐. 그래서일까. 오랜 암흑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예인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뚫고 이 험한 세상에 나왔다. 세상에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한 필자의 마음을 대신한 것처럼. 그가 내게 세련된 위로를 던진다. 나는 그의 마음의 단단함을 부럽게 엿본다. 자유분방한 노래와 춤을 통해 자유롭고 격정적인 감정을 대리 경험하는 기쁨이란.
나이 들었으면 어쩌랴. 그저 누군가를 좋아하고 마음이 즐겁고 흥겹다면 그게 다일 것이다. 흥겹게 춤을 추지는 못해도 내적의 흥을 끌어올리며 흥얼거린다. 'HOME SWEET HOME ♪' 아이들이 학교 간 이 낮 시간에 키보드를 두들기며 내적의 함성을 고요히 질러본다. 캬아아.
연예인. 좋아하세요?
▲ 사진 출처 : 지드래곤 POWER 무대. 마마 어워즈 캡처
덧. 오로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를 향해 흔들던 응원봉은 침묵해서는 안 되는 순간에 거리로 나와 밤의 거리를 밝힌다. 모든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모쪼록 그러려고 애쓰고 있다. 하나만을 위한 한 가지 열정의 빛이.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들처럼 다 함께 모여 여러 색깔을 뽐내며 자신만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향해 진정한 폭발력을 발하고 있다. 이로서 모든 이에게 진정한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