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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 여행자 Nov 27. 2024

뜨끈한 불가마에서

겨울나기  이야기

 매서운 바람이 불어온다. 옷깃을 단단히 세워보지만 옷 사이로 들어오는 이 서늘한 기온. 밖을 나서자마자 바지가 얼어붙고 걸을 때마다 바지 밑단 사이로 찬 기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늘은 회색빛으로 어두컴컴하고 하얀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한다. 11월 달력은 이미 눈밭이었지만 11월 끝자락이 되어서야 하얀 눈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첫눈이다.

 서울의 겨울은 너무 춥다. 제주의 바람을 누가 이길쏘냐 싶지만. 서울의 낮은 기온은 발을 얼어붙게 만들어 수족냉증을 가진 자의 발을 시커멓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맨발이 차가운 얼음 위를 걷는 듯 살갗이 에인다. 육지에서 맞이하는 겨울의 첫 해에 털모자, 목도리, 털장갑, 털부츠, 기모바지를 마련했다. 방한용품 없이 추위를 맞선다는 건 큰 오산. 모든 용품을 갖추고서야 영하의 겨울을 보낼 수 있었고, 또 새롭게 맞이할 수 있다고(지금은 준비태세를 갖췄다고) 자부한다.


 수족냉증을 가진 나는 목욕탕을 좋아한다. 목욕탕에서 사우나는 꼭 이용하며 가장 뜨거운 탕, 열탕을 좋아한다. 탕에 발을 넣었을 때 너무 뜨거워 아차, 발을 떼고 싶지만. 차가운 손과 발은 뜨거운 물을 환영하며 금세 부드러워지고 뜨뜻해진다. 반면 열이 많은 얼굴은 금세 붉어진다. 누가 보면 뜨거운 물에서 억지로 오래 견디나 싶지만 실상 얼굴만 그럴 뿐. 차디찬 몸은 천국이 따로 없다. 그래서 항상 바가지에 냉수를 받아놓고는 탕에 몸을 담근 채, 얼굴을 식히려 조금씩 찬물을 얼굴에다가 끼얹고는 한다. 비단 이렇게 추운 겨울에만 좋아할쏘냐. 아니다. 무더운 한 여름에도 애정하는 목욕탕. 폭염에도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면 그렇게 몸이 개운하고 시원할 수가. 사계절 뜨끈한 탕이 그립다.




 목욕탕 중에서도 찜질방이 최고인 듯. 목욕탕에 가서 몸의 때도 벗기고 찜질방에서 몸을 뜨뜻하게 데워주면 더할 나위 없다. 다행히도 집 근처에 찜질방이 있다. 그것도 엄청 큰. 언제 가나, 시시때때로 시기를 노려보지만 딱히 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이전에 아이들도 어렸어서 감기에 걸릴까 봐 목욕탕을 꺼려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들도 컸고, 새로운 문화체험(?)겸 찜질방 가기를 모색했다. 엄청 따뜻할 거라 회유하며.

 유명하고 큰 찜질방답게 시설은 넓고 깨끗하다. 찜질하는 곳도 다양하고 최신식 미디어를 볼 수 있는 미디어방도 따로 있다. 오호라 찜질방도 나날이 발전하는구나. 찜질방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몸은 곧장 가장 뜨거운 곳으로 향한다. 그곳은 72℃의 불가마. 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김이 내 몸을 감싼다. 좋아 좋아. 자리를 잡고 나무 베개를 머리에 갖다 대고 철퍼덕 눕는다. 바닥에서부터 뜨뜻한 기운이 올라온다. 스멀스멀 땀이 나면서 또로록. 좋구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몸이 따뜻해지고 땀이 뻘뻘 난다니. 열이 많은 얼굴부터 붉어지며 이마, 콧등, 목에 이르기까지 땀이 나기 시작하니 등과 배, 다리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열렬히 타오르기 시작한다, 불가마가. 주위의 시끄러운 말소리, 문을 열고 오고 가며 찬바람이 잠깐 들어오고, 내 옆에 누군가 자리 잡아 몸을 뉘이는 느낌까지도 저 멀리 아득해진다. 아. 뜨뜻해지니 모든 게 느긋해지고 여유롭다. 놀라워라.


▲  출처: 네이버.  연탄. 집게로 잘 잡아야 부서지지 않는다.


 몸이 따뜻해지니 연탄을 떼던 시절이 생각난다. 겨울에 연탄을 땔 때마다 5명 가족 모두 안방에 모여 이불을 깔고 누웠더랬지. 그때마다 머리맡 즉 붙박이 나무장이 있던 곳이 제일 따뜻했다. 그래서 잘 때 베개 밑에 손을 쑤셔놓고 자고는 했다. 그때 집은 주택으로서 방 2개, 부엌, 마루가 있고 물부엌이 있던 집이다. 물부엌에는 세탁기와 큰 갈색 고무통,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겨울만 되면 연탄아궁이에 물을 가득 담은 냄비가 있어 그 물이 펄펄 끓으면, 옆의 갈색 고무통에 담겨 있던 찬물과 섞어 몸을 씻고는 했다. 이렇게 연탄을 이용할 때는 추운 겨울이 애달프다. 당시에 엄마께서 연탄을 들이실 때에, 리어카를 끌고 연탄을 팔던 아저씨는 연탄 창고가 있는 2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셨다. 연탄을 몇 장씩 쌓아 올려 등에 지고는 계단을 저벅저벅 걸어가시던 그 모습.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올 때 연탄 아저씨를 볼 때마다 이제 겨울이 되었구나, 생각했었다.


 그 귀한 연탄을 처음 잡은 건 4학년 때. 엄마께서 집 밖에 있는 연탄창고에서 연탄 몇 장을 가져와라, 연탄을 갈아라 등을 지시하셨다. 집 밖 연탄창고에서 집게로 연탄을 집어 한 개씩 물부엌으로 옮기는 건 의외로 어렵다. 자칫하다 연탄이 집게에서 떨어져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나 쓸모없게 될 수도 있기 때문. 그렇기에 집게로 연탄구멍에 잘 맞춰서, 한번 연탄을 들어보고는 다시 재정비하여 연탄아궁이까지 잘 운반해야 한다.

 단지 운반에서 끝이 아니다. 연탄아궁이 뚜껑을 열고 위에 있는 연탄. 소명을 다해 노랗다 못해 하얗게 질려버린 연탄을 꺼내두고, 가장 밑에서 불에 타고 있는 연탄까지 꺼내고 나서야. 새로 가져온 연탄을 집어넣고 다시 아까 꺼내놨던 연탄을 올려놓고 아궁이 뚜껑을 닫아야 한다. 이렇게 간단하지만 일련의 순서가 있으며, 연탄의 위치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하교 후 연탄을 갈았어야 했다. 먼저 연탄집게로  연탄창고에 가서 조심스레 연탄 1장을 가지고 왔다. 안전운반 완벽수행. 그리고 아궁이 뚜껑을 열었다. 여기서 아찔한 실수. 아궁이 뚜껑을 바닥에 내려놨어야 했는데. 나름 철로 만들어진 무거운 뚜껑을 나는. 바닥에 내리기 귀찮아서 그 옆에 있는 세탁기 위에 올려놨다. 마침 세탁기 뚜껑이 닫혀있었고. 헌 연탄을 꺼내고 새 연탄을 갈아 끼우고는 마무리 짓기 위해 아궁이 뚜껑을 들었는데. 뚜껑이 안 들린다. 이게 뭐지. 다시 힘줘서 뚜껑을 들었는데, 세상에나. 세탁기 뚜껑에 구멍이 생겼다. 아뿔싸. 연탄아궁이 뚜껑의 뜨거운 열에 세탁기 뚜껑이 사르륵 녹아버린 것이다. 하아. 새어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이건 숨길 수도 없는 잘못. 어쩌지.

 폭포수같이 펑펑 흐르는 눈물을 애써 모른 척 다시 아궁이 뚜껑을 닫았던 건 기억나지만. 그 이후로 엄마에게 혼을 났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렇게 세탁기 뚜껑을 동그랗게 녹여버린 나는, 연탄에 대한 좋은 추억인지 나쁜 추억인지 모를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이제는 주위에서 연탄을 찾아보기 힘들다. 연탄 고깃집이나 연탄 기부 봉사를 통해 뉴스로 접할 뿐이다. 그렇게 연탄을 시간 맞춰 갈며 방안을 따뜻하게 데우던 시절을 지나.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는 보일러가 있어 얼마나 신기하고 좋았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 계속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보일러에 익숙해지고, 물을 시도 때도 없이 틀어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더욱이 보일러를 켜지 않아도 집이 따뜻하며, 침대 생활로 바닥에 이불을 깔던 일도 옛날일로 사라졌다.

 연탄을 때던 때는 바닥에 깔린 이불 밑에 손을 넣는 것이, 불가마 마냥 뜨뜻하고 좋았는데.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세상에서, 반짝이는 트리의 별처럼 환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는데. 굳이 찜질방을 찾아서 몸을 데워야 한다니. 그래도 좋다. 몸을 데우며 땀을 흠뻑 흘린 후 시원한 식혜쯤이야 맛있게 먹을 수도 있으니.



그렇지만 목욕탕에서 목욕관리사님에게 몸을 맡겨본 사람은 안다.

그분의 손이 닿으면 반복되는 일상에 찌든 몸이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드라워진다.

그 마법을 경험한 사람은 목욕탕에 갈 때 주머니에 반드시 현금 2만 원을 따로 챙겨 넣는다.


정혜덕 저. 『 아무튼, 목욕탕 』


 물론 때 미는 것도 중요하다. 목욕관리사님께 내 몸을 맡길 거 같으면 현금을 미리 챙겨놓는 것도 필요하다. 때를 밀고 찜질까지 더해진다면. 일상에 찌든 몸과 마음이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고. 꽉 끼던 옷도 여유로워지는 놀라운 마술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때밀이불가마로서. 가볍고도 따뜻하게. 이 추운 겨울을 맞이해 본다. 빨래 건조대에 널린 노란색, 초록색 때수건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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