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셋이 떠난 대만 타이중 여행(끝)
지나면 아련한 만화
그래서 찬란한
우리가 기다린 미래도 우릴 기다릴까
분명한 건 지금보다 환하게
빛날 거야 아직 서막일 뿐야
-이무진, <청춘만화>
대만 타이중에서 보낸 2박 3일. 낯선 길을 걸으며, 익숙한 일상 속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순간들을 마주했다. 삶의 또 다른 페이지를 그려가는 시간. 푸르른 공기가 사무쳤고, 하늘을 날아오를 듯한 자유로움이 가득했다. 그 여정 속에서 발견한 청춘 만화의 장면을 담은 마지막 기록.
"꼭 해야 하는 것 있니?", "없어."
이번 여행에서는 사라진 말, ‘꼭’. 예전 같았으면, “여기 가면 꼭 이걸 해야 한대.”, “이건 꼭 먹어야 한대.”, “이런 사진은 꼭 찍어야 한대.” 하며 계획을 빽빽하게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계획 대신 순간을, 욕심 대신 여유가 자리했다.
세계 10대 자전거 코스라는 <일월담>에서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우리의 체력은 소중하니까요. 배를 타고 유유히 떠다닌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유명한 딤섬 맛집이 아니라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딤섬을 먹었지만, 미슐랭 부럽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아닐까.
내 속도대로 걸었고, 내 순서대로 여행했다. '꼭 하지 않아도 돼.', ‘빨리 하지 않으면 어때. 천천히 하자.' 시계를 보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도 물흐르듯 편안했다. 귀국 비행기 시간을 착각했지만, 연착 덕분에 제 시간에 탈 수 있었다. 계획을 안했더니 하늘이 도왔나. 인생도 가끔은 이랬으면. 실수해도 좀 봐줬으면 좋겠다.
아직도 나는 시험 시간에 늦는 악몽을 꾸곤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시계 토끼처럼 시간에 쫓기며 살아서겠지. 조금 더 여유롭게, 나의 리듬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끝과 시작의 과정 사이에 쉼표를 넣어 그늘을 만들어 둬야지. 나를 좀 기다려 주자.
나는 무언가에 대해 섣부르게 단정짓곤 하는데, 타이중에 갔을 때도 그랬다. 첫날 <타이중 역> 부근을 다니며 "이곳은 노잼 도시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둘째 날 <펑지아 야시장>에 도착하자 타이중이 숨겨둔 활기와 젊음에 눈이 커졌다. 셋째 날에는 <국립 가극원>을 둘러보며, 타이중이 얼마나 우아한 도시인지 새삼 깨달았다.
한 곳만 보고 실망해서 더 보려 하지 않았다면, 타이중의 일부를 전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타이중이 하루 만에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 것처럼, 삶도 우리가 보지 못한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한 면만 보고 쉽게 판단하지 말자.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자. 유연하고 넓은 시야로.
마지막으로, '나'로 떠난 여행에서 깨달았다. 나의 청춘 만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오히려 앞으로 많은 명장면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마음을 울리는 잔요동이 밀려오는 그 순간들을 기억하자.
마흔이 넘어 맞이한 여행의 순간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세상을 배우는 시간들로 가득했다. '불혹'이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점점 더 어른이 되어가며, 나만의 그림을 그려가야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여전히 숨이 차곤 한다. 앞서가는 사람을 보며 마음이 급해지고,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불안해질 때도 있다. 어느새 출발한 지점은 점이 되어 보이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할 목적지도 선명하지 않다. 내가 기다린 미래가 나를 기다릴까. 때때로 자신이 없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길 앞에 서 본다. 조금 더 씩씩하게. 조금 더 용감하게. '한 번뿐인 이 모험을 겁내지 말고, 날아올라야지'라고 다짐한다. 언젠가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청춘 만화의 명장면이 될 테니까.
며칠을 야근했다는 친구는 여행 내내 기침을 했다. 허리 통증을 견디고 다리를 두드리며 걸었다. 일요일 밤늦은 시간, 지하철을 향해 뛰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청춘 만화의 한 장면을 완성했다.
'청춘'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게 며칠을 앓았다. 아이고 삭신이야. 하지만 여행의 순간을 떠올리면 입매가 둥글게 올라간다. 아마 아주 긴 시간 동안, 함께한 타이중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야야, 더 나이 들면 못해." 스무 살에도, 서른 살에도, 마흔 살에도. 매번 같은 말을 하면서도 방방 뛰는 나의 친구들. 신이 난 얼굴은 그대로다. 일흔이 되어서도 같은 말을 하며 뛰고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야야, 죽으면 못해."라고 하려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함께 웃어주는 친구들이 있어, 이 여행이 더욱 빛났다. 고마워. 함께해줘서.
건강하자. 오래도록 함께 청춘 만화 그려가며 여행할 수 있도록.
https://www.youtube.com/watch?v=_xFQKWlYv3k
캬! 친구와의 해외 여행이라니, 역시나 글 읽을 때마다 부럽고 부럽습니다. ‘꼭’이 사라진 자리를 여유와 자유가 메꿔준 여행기 잘 읽고 갑니다:)
2009년 이후 두 번째 친구와의 해외여행이었습니다! (세월이 야속하네요ㅎ).정말 오랜만에 느낀 여유와 자유였어요.
글로 열심히 남겨두고 나눌 수 있어 더욱 행복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저도 고등학교때 친구들 삼총사가 종종 만나는데요, 작가님 연재 글을 읽으며 아, 나도 더 늦기전에 친구들과 유연하게, 여유롭게, 넓은 시야를 가지고 떠나는 여행 한번 해보고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
와 작가님도 오랜 친구가 있으시군요.^^ 확 저질러보면 어떻게 되더라고요,
삼총사 친구들과의 여행 격하게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