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남자의 외출

드디어 터질게 터졌다

by 체리봉봉

홀가분하게 건강검진을 하고 3일이 지난 저녁이었다. 남편은 평소보다 조금 이른 퇴근을 했다. 아랫배가 아프다며 손으로 쓱쓱 만지는 모습이 이따금 있었던 일이라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이겠거니 하며 현모양처 코스프레로 따뜻한 찜질팩을 남편의 배에 올려 주었다. 그렇게 한두 시간이 흘러 남편은 허리를 펴지 못할 만큼 아파했다. 내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던 중 셔니가 먼저 말했다.

“아빠, 응급실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여전히 반신반의하며 남편에게 물었을 때 극심한 통증에 대답조차 하기 힘들어하는 걸 보니 이제야 현실 파악이 됐다. 다급해진 나는 장롱 면허 소지자로서 얼른 택시를 불렀다. 응급실에 도착해 대기를 하며 남편의 증상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다.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추려졌고 이제 의사가 직접 진단을 내리면 됐다. 남편은 혈액과 소변 검사, 복부 CT까지 모두 찍고 베드에 누웠고 우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가벼운 질병이기를 바랐는데 충수에 염증이 생겨 아예 터져 버린 것이었다. 남편은 이 극한의 고통을 얼마나 참았던 걸까. 내가 준 찜질팩으로 남편의 아랫배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의사는 병변의 한 증상일까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물어보았다. 나는 금세 머쓱해져 보호자 의자에 앉아 가는 헛기침으로 내가 한 일이노라 자백을 했다.




남편은 바로 입원을 하고 다음날 응급 수술을 받기로 했다. 나는 나이팅게일이 되어 남편을 간호할 생각에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남편의 만성적인 복부 통증이 다름 아닌 충수염- 남편의 충수는 정상 크기 이상으로 퉁퉁 부어 있었다- 때문일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해졌다. 회사 가기 싫어서 배가 아플 수도 있다며 꾀병 취급한 점, 병원에 가보라며 챙겨주지는 못할 망정 증상을 가벼이 여긴 점, 커피부터 줄여보라며 냅다 잔소리만 한 점 등이 그랬다. 나는 이번 기회에 성실하게 수발을 들며 빚진 것 같은 마음을 갚아보리라 다짐했으나 하늘은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일반 입원실은 자리가 없어서 남편은 간호통합병동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보호자는 얼씬하지 못하는 병실이라 나는 진짜 나이팅게일님들에게 남편을 맡겼다.


'감사합니다. 나이팅게일님'



면회조차 따로 할 수 없으며 환자가 직접 병실 밖에 나가 만나야 했다. 다시 말해 남편은 수술을 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컨디션이 회복되어야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수술 전 세면도구와 몇 가지 물품을 준비해 남편에게 건넸다. 수술실 앞에 대기실도 없으니 환자가 수술을 마치고 베드에 실려가는 모습 정도나 복도에서 볼 수 있다고 나이팅게일님이 말씀하셨다. 수술실과 회복실, 입원실에 들어갈 때마다 친절하게 문자로 알려준다며 보호자의 마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남편은 수술 다음날에나 보자고 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알겠다고 했다. 남편의 뱃속에서 터져버린 염증은 생각보다 많이 퍼지지 않아 순조롭게 수술이 마무리됐다.

다음 날 남편은 걷기 운동으로 빠른 회복을 보였고 나는 그를 만나러 병원으로 갔다. 남편의 컨디션 상태를 확인하고 수술 후기를 듣는 데 30분이면 충분했다. 남편과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얼른 퇴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입원 중 남편의 고열로 퇴원은 하루 연기됐고 결국 응급실 입성 후 수술과 퇴원까지 4박 5일이 걸렸다.



나는 내가 고난을 맞았을 때 늘 떠올리는 아포리즘을 남편에게 들려주었다. “재난을 기뻐하라. 업이 소멸되는 것이니.”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일본에서 3대 기업가로 존경받는 이나모리 가즈오의 명언이다. 비 온 뒤 땅이 굳는 법이라며 다시 파이팅 하자고 남편에게 쉴 새 없이 긍정라이팅을 했다.

남편은 말없이 한참 듣더니 갑자기 물었다. “수술 끝나고 간호사가 복도에서 대기하던 보호자들을 부르던데?” 분명 나더러 집에 가 있으라고 하더니 그래도 조금은 서운했었나 보다. 대문자 T인 남편도 이 순간만큼은 다정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드디어 남편은 외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성을 담은 따뜻한 밥상으로 그의 마음을 폭 안아줘야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내 속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