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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복원한다는 것은

소설 <대온실수리보고서>를 읽고

by 체리봉봉

기억에 색을 입힌다면 어떤 색깔이 될까. 이 책을 읽는 내내 강화도의 바닷빛이 떠올랐다. 쪽빛으로 넘실거리는 바다를 보며 외로움을 쏟아냈던 영두. 뜻밖에도 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성을 맡으며 투명한 유리창으로 만든 거대한 온실을 조우한다. 햇빛에 반사된 온실 유리는 거대한 물비늘처럼 반짝여 푸른빛을 만들어 낸다. 영두의 고향인 강화도의 바다와 한낮의 온실은 영두의 마음속에 흐르는 슬프고도 우울한 상처를 비춰주는 거울 같기도 하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모친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은 오로지 어린 영두가 감내해야 하는 수난이기도 했다. 뜨거운 손바닥 위에 얼음이 녹을 때까지 견뎌야만 하는 고통 같은 것이라고. 영두는 원서동에서 만난 순신에게 그렇게 말한다.



책은 영두와 할머니의 수난, 그리고 창경궁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기억을 복원하고 상처를 어루만진다.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로 유학을 온 영두는 창경궁 옆 낙원하숙에서 안문자 할머니와 지내게 된다.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것만 알 뿐,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와 그녀의 친손주는 아니지만 동갑내기 리사라는 아이를 만난다. 창경원으로 오가는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도, 한겨울 캄캄한 밤에 꽝꽝 언 창경원 춘당지 빙판에서 얼음을 치며 스케이트를 탔던 추억도 리사 덕분이었다. 리사는 얼음처럼 냉랭한 성정으로 영두의 마음을 괴롭혔지만 영두는 하숙집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지낸다. 그러나 순신과의 만남과 연애 그리고 이를 질시했던 빽과 리사의 모함은 영두가 지니고 있던 사람에 대한 신의마저 무너뜨렸다. 수학 선생님 푸토벤이 빼돌린 중간고사 시험지를 미리 본 학생 중 하나가 영두라고 거짓 진술을 한 것이다. 영두는 딩아주머니의 말대로 당차게 대거리 한번 해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강화도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원서동에서의 추억도 아픔도 잊고 지냈었다. 기억 너머에 아련하게 떠오르다가 사라지는 과거와 마주한 것은 창경궁 대온실 수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낙원하숙 대문의 독특한 유리 손잡이와 일제강점기 지어진 창경원 대온실의 유리창은 묘한 기시감을 준다. 할머니와 대온실에 얽힌 잊힌 상처가 영두의 손에서 해원 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두가 대온실의 역사와 관련 문헌을 찾고 온실의 지하를 파헤치며 발견한 것은 공교롭게도 할머니의 과거였다. 늘 의문에 싸여 있던 안문자 할머니의 마리코 시절 이야기가 수십 년의 시간을 지나 생생하게 복원되었다. 마리코와 그의 동생 유진, 양부 박목주는 광복 후 일본과의 교통이 단절되며 조선에서 잔류 일본인으로 살아야 했다. 설상가상 갑작스레 터진 한국전쟁으로 마리코와 유진은 창경궁 대온실 지하에 숨어 지내야 했다.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겠다던 아버지는 상사인 이창충에게 죽임을 당하고 어린 동생 유진은 열병을 앓으며 생사의 기로에 선다. 마리코는 이창충의 겁탈 시도에 잿물을 채운 주사기로 눈을 찔러 실명하게 했다.



마리코는 동생 유진이 열병으로 사망한 줄 알았고 유진은 이창충을 대온실에서 꺼내 준 은인으로 착각하며 살아왔다. 뒤늦게나마 영두가 만난 유진은 그의 양자가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왜곡된 진실과 오해는 지하실에서 발견된 유해 더미처럼 켜켜이 싸여 남매의 운명을 갈랐다.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며 가슴에 묻고 살아왔을 지난날의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영두는 차마 유진에게 그 진실을 마주하게 할 수 없었다. 평생의 은인이 실은 아버지를 죽이고 누나를 겁탈하려 한 원수임을 안다면 유진은 결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창경궁 대온실 보수 공사는 공간에 얽혀 있던 인물들의 기억을 생생하게 건져 올리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강화의 바다가 주는 안온함 대신 영두의 내밀하고 은밀한 다락방 같은 곳이 되어준 창경궁은 안문자 할머니에겐 돌이키고 싶지 않은 비운의 장소이자 어린 날의 마리코가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일본에 떨어져 있는 어머니에게 유일한 죄인일 뿐이라며 독백하던 마리코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죽였다. 안문자 할머니는 부산까지 피난을 갔지만 결국 다시 되돌아온 곳은 창경궁 옆이었다. 양부 박목주가 배신을 당하고 총살을 당한 장면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동생이 죽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곳에서 할머니는 꿋꿋하게 살았다. 한평생 상처를 끌어안고 산 할머니에게 영두는 친밀한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진한 외로움의 냄새를. 수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시간을 할머니는 몸 안에 삼키고 또 삼켰다. 할머니는 잘린 가지를 옹이로 만든 오래된 나무 같은 사람이다. 상처받은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할머니도 상처 입은 어린 영혼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그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영두가 친구들의 모함으로 말 못 하며 괴로워할 때 학교를 먼저 찾아간 것도 할머니였고 강화도에 내려가 집 안에만 은신할 때도 영두를 찾아간 사람도 할머니뿐이었다. 영두가 쓰던 가죽 스케이트화를 선물처럼 들고 나타나 말없이 내민 할머니의 마음을 영두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말없는 침묵이 주는 진지한 위로를 영두는 고스란히 느꼈다.



영두는 채 의식하지 못했지만 할머니에게 받은 위안과 치유를 분명 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창경궁 온실을 보수하며 알게 된 할머니의 진실을 밝히는 것. 어쩌면 우연처럼 맡았지만 운명처럼 다가온 그 일은 할머니와 영두의 진한 인연을 말해준다. 동궐관리청 공무원의 못마땅함을, 바위건축사무소 소장의 분노에도 영두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대온실 지하를 발굴하는 작업을 결국 끝마친다.



창경궁과 낙원하숙은 할머니와 영두의 교집합이 되어 둘을 더 단단하게 결속시킨다. 일제 강점기 그리고 광복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첩된 시간을 넘나들며 창경궁의 과거와 영두의 현재가 나란히 이어진다. 공간을 복원하는 일이 곧 시간과 기억을 복원하는 일과도 같다는 것을, 곧 치유와 회복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어린 영두에게 상처를 주었던 리사도 낙원하숙을 매개로 성인이 되어 재회하게 된다. 할머니의 유산인 낙원하숙을 상속받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리사는 영두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청한다. 창경궁 대온실을 수리하며 할머니의 묻혀 있던 과거를 밝히고 해원을 해주었듯 할머니의 낙원하숙은 영두가 리사와 화해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영두는 은혜의 딸 산아와 그의 친구 스미와 찾은 가회동에서 순신과 우연히 만나 그의 이메일 주소를 받는다. 과거는 모두 정리되었고 이제 미래를 향해 당당하게 걸어 나가면 된다. 상처를 딛고 선 이들의 강건한 발걸음이 창경궁을 울린다. 강화의 바닷빛보다, 창경궁 대온실의 반짝이는 유리보다 더 빛나는 내일이 이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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