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밤 Oct 25. 2024

삶의 희극과 비극

크리스마스엔 페퍼민트모카


 예정 대로라면 99학번이 되어야만 했다.

 2000년을 앞두고 설렘과 혼란이 공존하던 1999년 나는 재수의 길을 택했다. 다시 시작된 고3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고 대학생이 된 친구들의 안부전화에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에둘러 말하며 끊곤 했다.

하지만 내년이면 2000년이라고, 1999년 9월이 의미 있는 날이라며 만나자는 한 친구의 연락에 마음이 흔들렸다. 사실 아무 날도 아님을 알지만 마음속 외로움이 말한다.

  ‘더운 여름 도서관에서 사투를 벌인 나 자신에게 주는 휴식으로 하자. 수능 전 딱 한 번이야.’

꾸며도 재수생 같은 내 모습이 싫었지만 이화여대 앞 스타벅스로 발길을 향했다.

 

1999년 9월 처음 가본 스타벅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이화여대 앞 스타벅스는 체감상으로 시애틀 1호 스타벅스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친구는 커피도 케이크도 사준다며 마음껏 고르라고 했다.

커피 종류는 얼마나 많은지, 한참을 고민하다 선택한 커피는 카페모카.

커피에 초코시럽이 들어가고 휘핑크림이 듬뿍 올라가 있는 조합은 믹스커피나 캔커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이 맛이었다.

커피 한잔에 재수 생활로 주름진 마음이 말끔히 펴졌다. 이런 커피를 매일 마실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일 거야. 스타벅스에서 카페모카를 마시며 대학생이 된 나를 생각하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힘든 재수 생활 끝에 대학생이 되었다. 노력과 열정, 실패마저 낭만이었던 시절.

그 무렵 푹 빠진 미드의 주인공이 한 손에 그란데 사이즈 라테를 들고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을 볼 때면  마치 나의 미래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사회로 나가는 길은 예상보다 난했고, 열정만 가득했던 나는 미숙함 투성이 사회초년생이 되어 있었다. 미드 속 멋진 그녀들은 미드 속에나 있었다.

열정이 곧 능력이라 생각하며 사회초년생이 된 나에게 사회의 평가는 훨씬 더 냉정했다.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던 날들. 바쁘기는 매일 바쁜데, 마땅히 잘하는 게 없어 칭찬 한번 듣기 어려웠던 작은 시절. 운명처럼 두 번째 커피를 만나게 된다.


페퍼민트 모카.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맛볼 수 있는 커피.

익숙한 카페모카 맛에 민트 특유의 향이 얹어지면서 달콤한데 화한 두 가지 맛이 매력을 뽐낸다.

둘 중 누가 이길까. 결과는 민트의 승. 민트의 상쾌함이 카페모카의 달달함을 누른다. 혹자들은 그런 이유로 이 커피를 두 번  다시 입에 대지 않았지만, 나는 좀 달랐다.

심지어 라이벌인 토피넛라테에게 밀리는 신세였지만, 나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면 다음 해의 겨울을 두 손 모아 기다릴 만큼 마음을 빼앗겼다. 겨울에만 볼 수 있는 빨간 컵에 담긴 페퍼민트모카와 귓가에 흐르는 캐럴이면 그 해 연말은 충분했다. 올 한 해도 잘 살았구나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면서 내년에는 뭔가 더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약간은 들뜬 기분이 들었다.


어디 연말뿐이겠는가. 20대의 크고 작은 고민들이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나는 제제가 라임 오렌지 나무에게 마음을 털어놓듯 스타벅스로 달려가 커피를 친구 삼아 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내 노력이 결과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된 사회 초년생, 조그만 격려 하나가 목말랐던 어른 초입의 사회초년생에게 그 시간은 스스로 위로하고 일어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열정 가득했던 20대, 결혼과 육아에 치열하게 살았던 30대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도 크리스마스에 페퍼민트모카를 마시러 스타벅스에 가냐고 묻는다면… 육아와 일에 치여 사는 동안 페퍼민트모카는 단종이 되어서 마실 수 없게 되었다. 제일 반짝반짝 빛나던 그 시절 함께한 친구와 안녕을 했다.

 

 

1999년 나를 스타벅스 1호점으로 불러줬던 친구와는 지금도 스타벅스에 간다.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하며 웃지만 넉넉지 않던 대학1학년 학생이 재수생 친구를 위해 커피와 케이크를 사주던 그 마음이 새삼 고마워 농담인 듯 말한다. 그때 그 커피는 그냥 커피가 아니었다고. 많이 고마웠다고.


                     



 이제는 크리스마스가 예전처럼 설레지 않고, 커피를 매일 한잔씩 마시는 것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삶의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카페에 간다. 젊은 날의 설렘이나 열정이 빠진 자리에 소소한 행복과 다정함과 감사를 채우고 매일이 크리스마스인 것처럼, 매일 마시는 커피가 페퍼민트모카인 것처럼 오늘을 살아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