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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밤 Nov 15. 2024

누구나의 '원래'

민서의 여행


민서는 늘 타인의 기분을 살폈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다.

학창 시절 실수로 물을 쏟은 친구에게 물을 닦아주고 차고 넘치게 사과를 한 후에도 하교 후 '아까 정말 미안했어' 메시지를 한번 더 보내야 비로소 완벽하게 사과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 다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오는 길엔 그날의 대화를 복기한다.

내가 실수 한 건 없는지. 분위기에 휩쓸려 말실수는 없었는지.

필터에 걸리는 게 있다면 카톡이 아닌 전화로 미안함을 전한다.

"아까 내가 심했던 것 같아. 미안해"

민서의 전화를 받은 친구들은 대부분 그 말을 기억  못 한다.

할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서로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을 때 만난 친구들끼리 애피타이저로 던진 휘발되는 말들을 크게 기억하는 친구는 없을뿐더러 , 애초에 민서의 농담은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를 정도의 그것이 못되었다.



민서를 늘 피곤했다.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는 것도, 그만두려고 해도 본능적으로 작동되는 눈치 덕분에 사람을 만나는 일이 힘들었다. 타인과의 시간이 재미있었더라도 그것은 늘 피곤을 동반했다.

민서는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는 일과 타인의 무례함에 상처받는 것에 지칠 때면 혼자 있는 시간 속으로 숨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만나는 다정함. 그것들을 마음속에 적립하기 시작했다.

마음에 작은 상처가 하나 생길 때마다 적립했던 다정함을 꺼내 발랐다.

다정함을 생각보다 힘이 세서 제법 큰 위로가 되었다.

20대 중반의 민서가 터득한 방법이었다.





“내가 이것도 당신 허락을 맡고 가야 되냐고”

아주머니는 소리를 질렀다.

온라인면세점에서 구매한 면세품을 찾기 위해 대기표를 뽑는 키오스크 앞에서.

키오스크는 두대였는데 하나는 먹통인지라 한대의 키오스크에 줄을 섰다.

그런데 하필 키오스크 앞의 아주머니가 전화통화로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여권을 스캔하면 번호표가 나왔고 그 번호대로 면세품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머뭇거리던 민서가 말한다.

“혹시 지금 뽑으실 거예요?”

꽤 예의를 갖췄다. 이 정도 말의 온도라면 싸움 날 일은 없다.

하지만 앙칼진 목소리가 돌아온다.

“기다려요.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아서. 알아서, 알아서

뒤에 줄이 이렇게 길어지고 있는데 알아서 라니.

더 뒤에 사람이 말한다.

줄 서있는 거 안 보이냐고, 안 하려면 비키라고.

그제야 아주머니는 천천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여권을 꺼낸다.

30초면 끝나는 여권 스캔 대신 여권번호를 하나하나 누른다.

그리고 대기표를 뽑고 면세장으로 들어가며 한마디 한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이번 여행은 오랫동안 계획했던 혼자 하는 여행이다.

일본소설과 드라마를 좋아했던 민서는 근 2년 틈틈이 일본어를 공부했다.

친한 친구와 갈 수도 있었지만 24시간 타인과 함께 있는 건 자신이 없었다.

3개월 전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숙소 예약을 했다.

사실 여행에는 여행 전 설렘의 지분이 크지 않은가.

민서는 혼자 하는 여행을 실행에 옮겼다는 만족감까지 더해져 한껏 기분이 들떴다.


그런데 아주머니의 한마디가 민서의 기분을 한없이 끌어내린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다시 안 볼 사람인데 민서는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기분이 안 좋다.  


기분 좋은 생각을 한다.

차곡차곡 적립했던 다정함과 친절함을  필사적으로 꺼내어보며 비행기에 오른다.




H6.

민서의 자리

옆자리가 누굴까 다소 긴장하며 좁은 통로를 걷는다.


H6.

찾았다.

머리 위에 찾아온 면세품을 올리고 자리에 앉자 익숙한 모습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민서를 못 알아보는 듯한 아주머니.

“아침부터 재수 없게”의 주인공.


민서는 얼른 헤드폰을 끼고 모니터를 켠다.

아주머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에 안도를 느끼며

오직 정면만 본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니터 응시뿐.

비행기는 활주로를 이동하며 이륙 준비를 한다.






“저기요"

옆자리 아주머니가 말을 건다.

“아가씨는 혼자 여행 가는 거예요? 나도 딸이 혼자 유학에 가 있잖아. 오랜만에 딸 보러 가는 길이에요. 이거 사탕 하나 먹어요. 비행기를 많이 안 타봐서 그런가 비행기 뜰 때 귀가 아프더라고”


민서는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사탕을 받는다.


“내가 원래 오지랖이 좋아요. 딸 만한 아가씨들만 보면 더 그렇다니까.”


짧은 대답과 어색한 미소를 짓고 모니터 쪽으로 얼굴을 돌린 민서는 생각한다.



사람의 '원래'란 무엇일까.

키오스크 앞 무례함과 옆 좌석 사람에게 사탕을 건네는 다정함 중 아주머니의 ‘원래’ 란 무엇일까.

타인의 ‘원래’를 짧은 순간 단정 짓고 상처받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민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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