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드라마촬영장>
둘째 주 주말에 뭐 하냐?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남매의 전화는 늘 용건이 간단하다.
얼마 전 주말에 동생네 부부의 초대로 다 같이 순천 여행을 다녀왔다. 남동생의 "뭐 하냐?"는 전화는 '누나 일정 없으면 같이 놀러 가자.'는 뜻이 담겨있다.
우리 집과 동생네는 차로 1시간 거리. 그럼에도 한 곳에 모여 한 차로 다 같이 이동하자고 먼저 제안해 준 것은, 형님은 뒤에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되는 풀패키지이니 걱정 말라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 어디 껴주기만 해도 감지덕지인 나이인데 게다가 난 시누이가 아닌가. 시누네 식구들을 자진해서 풀패키지 서비스로 모시겠다는 건 누가 잘해서일까. 이 부분은 모두의 상상에 맡기자.(웃음)
그렇게 우리 집 4 식구, 동생네 3 식구 한차로 새벽 4시부터 시작된 짧지만 알찬 국내 여행이 시작되었다.
올빼미형 우리 집 가족에게 4시면 잠든 지 얼마 안 된, 차라리 잠을 자지 말까 고민되는 애매한 시간이다. 방학이라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밤의 자유를 즐기고 계신 우리 아드님에겐 더더욱 그렇다. 그래, 조금이라도 자라고 일단 말은 건네본다. 그래야 잘 놀 수 있지 않겠냐고. 아니, 그 나이에 가족 여행에 따라 나서 주는 것만도 그저 고맙다. 요즘 우리 네 식구 다 같이 여행 다닐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여전한 둘째 껌딱지는 뭐, 어쩔 수 없이 일찍 자러 가고, 이제 잠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다음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게 느껴진 나와 남편도 둘째랑 같이 이른 시간이 잠이 들었다. 그렇다. 4시는 우리에겐 정말 너무 이른 시간이지만 누군가와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평소의 나를 좀 양보해야만 가능한 행위일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나만 양보하는 것 같고 내 양보가 더 큰 것 같겠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다. 무엇보다 난 시누이가 아닌가 말이다.
어떤 약속이 성사가 되었다는 건, 조금 더 양보하는 쪽이 존재해야 가능한 행위이다. 그렇지 않고서 서로 똑같은 양을 양보해서는 성사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4시에 일어난 걸 양보라고 한다면 여행하는 동안 우리가 받은 양보의 양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값지고 게다가 많다.
동생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6시 20분. 예상시간보다 20분이 늦었다. 새벽인데도 이렇게나 많은 차가 도로에 있다니.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수많은 불빛을 보며 내가 알지 못하고 겪어보지 않은 세상이 많다는 것도 실감하다. 보지 못해서 모르는 세상. 겪어보지 못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얼마나 많을까. 순간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 든든하기도 하다. 아직 해도 뜨기 전이라 어두운 고속도로를 참 빠르게 바쁘게들 움직인다. 그 속에서 마치 운전한 지 얼마 안 된 왕초보 운전자처럼 조심조심 운전하느라 예상시간보다 10분 이상이 지체되었다. 어두운 주차장에서 우리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을 동생네 가족, 잘했다고, 천천히 잘 왔다고 고마운 말을 한다. 말도 참 이쁘게 하는 동생네 부부이다.
이제 그때부터 우린 관광객 모드. 뒤에서 자고 먹다가 깨우면 구경하고 놀고, 또 먹기만 하면 되는 편안한 여행. 어느새 눈 떠보니 휴게소. 아침을 먹으라고 깨운다. 아메리카노 한잔만 마실까 싶었다가 다들 먹는 뜨끈한 국물을 보니 콩나물 해장국이 먹고 싶어 진다. 우리 집 막둥이 옆구리를 찔러 같이 먹기로 약속을 한다. 이번에는 막둥이의 양보로 콩나물 해장국을 먹게 되었다. 어제저녁 술도 안 마셨는데 어찌나 아침부터 해장국이 술술 잘 들어가던지. 좀 전에 커피로 때우겠다 고민하던 같은 사람이 맞는 걸까. 어느새 한 그릇 뚝딱이다. 여행 오면 식욕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좋아지는 것 같다. 역시나 다이어트는 여행 끝나고 하기로 하고 신나게 먹고 놀아보자.
우리를 데려온 첫 번째 여행지는 <순천드라마촬영장>이다. 10시 즈음 도착한 촬영지의 주차장은 비가 올랑 말랑 한 습한 찬 기운으로 여기는 뭐 볼 게 있으려나, 기대감이라고는 별로 생겨나지 않는 분위기이다. 전에도 비슷한 영화 촬영지는 가봤으니 여기나 거기 나겠지. 큰 기대 없이 출발한 촬영지. 한국영화, 드라마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나에게 가장 눈에 띄겠은 파친코 촬영지. 책으로 읽었더니 흥미가 생긴다. 게다가 멀리 4시간이나 운전해서 데려온 사람도 있는데 뒤에서 자기만 하다가 "여기 뭐 볼거나 있어"하는 뚱한 표정은 예의가 아니다. 본격적으로 흥을 끌어올려 신나게 놀 준비를 한다. "우와~ 엄마 어릴 땐 말이야~"로 시작된 라테는 놀이. "자기 때도 그랬어?" 앞자리 6이라고 놀리며 시작된 촬영장 구경은 어릴 적 추억의 장소와 놀이를 소환하기 충분한 장소였다.
각자 자기가 본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며 입들이 바빠진다. 벽에 붙어있는 영화 속 장면과 세트장을 번갈아 가며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장면이 떠오르니 점점 더 재미가진다.
게다가 다녀와 봤다는 증거를 남겨야 하니 사진도 여러 장 찍는다. 그 나이 때는 귀찮음이 지극히 정상인 아들과 딸의 마지못한 협조로 증거 사진은 순식간에 후다닥 끝내야 한다. 그간의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이다. 청소년의 사진은 빠르게 찍을 것! 서 있어 줌을 감사히 여길 것! 많은 것을 바라지 않을 것! 이것들을 기억하면 가정이 평화로울 수 있다. 여행이 순조로울 수 있다.
7,80년대의 골목과 상점들이 나의 어린 시절을 마구마구 떠오르게 만들었다. 나무를 이어 붙여 만든 걸상과 주황색 공중전화, 회수권, 곤로. 부엌의 한쪽 구석에 쌓아둔 연탄들. 남동생과 우리가 둘이 칼국수를 해 먹겠다며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이야기. 연탄불 가느라 힘들었단 이야기. 같은 시간의 다른 기억의 조각들을 짜 맞추어 본다. 그간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묻어 놓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소환된다. 내 기억엔 없는 것들을 네 기억을 불씨로 살아나고 네 기억의 불씨도 나로 인해 당겨진다.
달동네를 꾸며놓은 세트장은 그 리얼함에 소름이 끼칠정도이다. 서울의 어느 지역이나 다 있었을법한 언덕 위의 다닥다닥 붙여지어 놓은 집들. 그 골목들. 문간의 공용 화장실, 대문옆 계단 위 장독대, 주인집, 셋집. 그리고 시대를 연상케 하는 벽에 붙어있는 대통령 선거 전단과 반공 포스터들. 이 모든 것이 머리와 가슴속에서 필름을 거꾸로 플레이한 듯 그 형태가 살아나 재생된다. 그래, 그때 그랬었지. 다들 그렇게 살았었지. 다른 촬영지랑 다르게 내가 살고 경험한 그 시대의 풍경은 나에게 나만의 인생 영화를 재생시키기에 충분한 영감을 제공했다.
6,7,80년대생, 그리고 2000년 이후의 아이들이 구경한 촬영지의 느낌은 각자만의 다른 영화가 되어 마음속에서 또 먼 미래의 어느 날 재생되겠지. 당시에는 몰랐던 감정을 한발 떨어져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느끼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오길 잘했네. 데려와줘서 고맙네.
이제 우리 열심히 걷고 놀았으니 밥 먹으러 갑시다. 우리 이제 뭐 먹으러 가니? 동생아~~
"보리밥 먹으러 가자~"
역시 음식은 전라도가 최고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한상 가득 차려 나온 보리밥은 다시 봐도 침이 고인다. 야들야들 잘 삶아진 수육에 불고기, 생선과 나물 가득 넣은 보리밥. 그리고 양념게장에 된장국. 이 모든 게 인당 15,000원이었다.
우와~ 맛집에 데려와줘서 고마워.
다음은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