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무심하게 툭 말을 던졌다. 아이를 키우는 게 고된 일이긴 했지만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를 키운다고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은 육아와 집안일 같은 다른 중요한 일에 치여 뒷순위로 밀렸다.
도대체 반짝반짝 빛나던 나의 20대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아이들이 등원하고 난 후 집안에서는 적막함의 공기가 감돌았다. 텅 빈 식탁의자에 털썩 앉아 호흡을 가다듬고는 종이를 꺼내 내가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들을 떠올려 보고는 끄적끄적 써 내려갔다.
1. 중어중문학을 전공&교직이수
2. 국제통상학 복수전공
3. 중국어와 영어를 할 수 있다.
4. 한자급수자격증이 있다.
5. 짧은 회사경력(1년 6개월)
6. 컴퓨터 그래픽스 자격증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때까지 내 전공을 살리는일 만큼 세상에 멋진 일은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근데 우리 과 선배들을 보니 자기 전공을 살려서 취업한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게다가 문과생의 경우에는 전공과 무관한 직업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지방에서 중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직종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게다가 경력단절 경력만 무려 8년, 이런 끔찍한 조건을 가진 사람을 채용할 회사가 몇이나 되랴.
만약에 무역 관련 회사에 들어간다고 치더라도 최소 8시간 플러스알파 2시간은 회사에 있어야 하는데 어린 핏덩이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맡긴다?
실은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특별한 존재였다.
큰 아이가 5세가 되었을 때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서준이가 계속 애들 건들고 가만히 있지를 못하네요. 오늘도 서준이가 건드는 바람에 여자아이들이 울었어요.”
5살 아이가 장난기가 많을 수도 있지.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만 생각을 했지만 항상 비슷한 내용의 전화가 하루가 멀다 하고 걸려왔다. 아무래도 소아정신과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원장선생님의 상담을 받고 나서야 어딘가 모를 낯선 장소의 그 이름. 소아정신과를 예약해 찾아갔다.
검사한 지 한 달 후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전형적인 ADHD네요.”
“ 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손가락 발가락 5개로 태어난 신체 건강한 아이가 ADHD라고? 난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마치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의 느낌이었다. 그날 하염없이 울었다.
둘째도 발달이 느린 아이였다. 언어발달이나 운동신경발달이 또래보다 1년 반정도 느리다고 했다.
내가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 생긴 걸까? 처음부터 뭐가 잘못된 걸까?
손길이 두 배 이상 필요한 이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일반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파트타임 형식으로 몇 시간만 일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장롱면허증 마냥 꽁꽁 숨겨두었던 교직자격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인 건가? 잠시 마음이 달아올랐다가 이내 식어빠진 커피처럼 차갑게 변했다.
사실, 대학에서 굳이 교원자격증을 취득해 두었던 건, 교사라는 꿈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땄다. 막연함뿐이었다. 그걸 들고 뭘 해봐야겠다는 청사진 따위는 없었으면서 참 악착같이 땄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만 주어지는 기회라는 게 내 승부욕을 자극했고, 그래서 학점을 위해 노력한 거였다. 당시의 그런 내게 교생실습이란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처럼 언젠가 한 번쯤 해보면 재미있을 것도 같은 흥미로운 체험 같은 것이었다.
교원자격증은 갖고 싶었으면서도 교사가 될 맘은 없었던 속내는 따로 있었다. 내가 정말 교사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그것이었다. 안될 것 같았다. 바늘구멍이라는 임용고사를 통과할 자신도, 몇 년이고 합격 때까지 고시원에 갇혀 공부할 마음도 없었다. 임용이라는 버거운 도전을 위한 자격이라기보다는 최선을 다한 대학생활의 증거 정도로 이미 충분했다.
교육 쪽으로 경력이 전무한 나를 채용할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고난이 따르겠지만 일단 단기목표로 중국어 방과후 교사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어린이 중국어 지도사 자격증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공부를 통해서 티칭 스킬을 익힌다면 현장에서도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자격증을 교육하는 곳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기서 서울까지 4시간 반 거리를 오고 가야 된다는 생각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갈팡질팡 고민만 하다 15분의 전화상담 끝에 결정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 그까짓 것!
4시간 반 이상 걸리는 거리를 매주 토요일마다 왔다 갔다 하는 게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스스로 노력해서 배우고 진일보하는 성취감과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될 거라는 생각에 하늘에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지도교수법을 익히며 배웠다. 내가 그 공간에 있을 때만큼은 서준이 엄마가 아닌 정은영이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피곤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찾은 그 즐거움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필기시험과 수업실연까지 통과하여 결국에는 어린이지도사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자격증까지 따고 나니 뭔가 시작해 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연이어서 우리 지역 여성능력개발센터에서 진행하는 어린이 한자 지도사라는 강의를 신청했다. 아이들을 원에 보내놓고 나 홀로 일주일에 세 번 센터에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시험까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벌써 1년 안에 자격증을 두 개나 땄다!!!
어찌나 뿌듯하던지 그 당시를 떠올리면 미소가 지어진다.
아이를 키우면서 피곤한데, 공부해서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역시 사람은 마음먹기 나름이구나! 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궁금해하실 거다.
“방과후 교사가 되셨나요?”라고 많이들 여쭤보실 것이다.
내 대답은 NO! 다. 자격증까지 취득해서 자신감이 어느 정도 올라왔건만 학교의 벽을 뚫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초등교사인 친구의 말을 들으니 도전해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친구말인즉슨 학교의 일자리는 암암리에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계속하시는 분들도 항상 최선을 다하시고 학교의 윗사람들도 굳이 문제가 없다면 바꾸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친구의 한마디 말에 다시 이제 겨우 불 좀 피워보려고 살아났던 작은 불씨가 점점 사그라져 갔다. 이렇게 학교와의 연은 멀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