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지 못했지만 사랑을 그렸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우리 3월에는 반고흐전 보러 가요."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전시회를 보러 가자하셨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는 보통 전시회를 즐기지 못한다. 하지만 작가님들을 만날 수 있고, 고흐와 테오의 편지를 모아 놓은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다시 읽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을 기회. 놓칠 수는 없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10년도 훨씬 전에 읽은 적이 있다. 그때의 나도 뭔가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여서 고흐의 고민과 좌절이 참 아프게 다가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유럽 어딘가에서,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나는 고흐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고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착란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그냥 그 정도였다.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테라스', '자화상' 등 몇 개의 작품은 알고 있었고, 그중 별이 빛나는 밤을 가장 좋아하긴 했지만 그의 강렬하고 화려한 그림은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었던 걸로.
그 후 시간이 흘렀고, 책을 다시 꺼내 읽지는 않았지만 버리지도 못했다. 두바이에서 시드니로 그리고 서울로 여러 번의 큰 이사를 다니면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책들 틈에 '영혼의 편지'도 있었다. 오랜만에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림이 더 선명하고 일부 번역도 살짝 수정된 개정판도 구입했다. 40대가 된 내가 그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고흐를 다시 만났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 고흐의 생각과 태도, 그림을 향한 고민과 끊임없는 시도는 지금의 나에겐 위로를 넘어선 감동이었다. 글로 빈센트 반 고흐를 읽으며,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의 삶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깊은 외로움도 느껴졌지만, 그 보다 더 깊은 그의 사랑이 느껴졌다. 살아서는 동생 테오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고흐. 그래도 그는 늘 사랑하고자 했다. 사랑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인간을, 자연을, 그리고 그림을.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고, 살지 않을 것이고, 살아서도 안 된다. P.46
전시장에 들어서자 고흐의 초기 시절 그림이 보였다. 쪼로미 걸려있는 인물화들. 시선을 차례로 움직이다 멈췄다. 할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무표정의 할머니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림 속 그 눈이 너무 깊어서, 살아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올라왔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은 아니다. 우울함에 허덕이던 시절 동료들에 이끌려 억지로 밀라노 두오모 내부에 들어섰을 때 그랬고, 캐나다 상공을 날고 있을 때 조종실에서 호출이 와서 들어서다 코앞에서 오로라를 처음 보았을 때 그랬다. 그래,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지. 도떼기시장 같은, 많은 사람들 틈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지만 같이 간 작가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무사히 다음 작품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성당보다는 사람의 눈을 그리는 게 더 좋다. 사람의 눈은 그 아무리 장엄하고 인상적인 성당도 가질 수 없는 매력을 담고 있다.
거지든 매춘부든 사람의 영혼이 더 흥미롭다. P.165
고흐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멋지고 고상한 사람들만 그리지 않았다. 그게 누구든 사람들의 진실된 영혼과 본질을 담아 그리고자 했다. 그래서 고흐의 그림에는 다른 화가의 그림에선 잘 볼 수 없었던 노동자들, 가난한 사람들, 농부들이 많이 등장한다. 고흐에게 그들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삶을 같이 살아가는 존재들이었고 그는 스케치 또는 붓터치로 그들의 영혼을 그대로 담고자 했다. 고흐에게는 아무 편견 없이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눈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자기 일에 더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간다.
늙고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 (중략)...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거리를 산책하다가 내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이 "아, 저 지저분한 사람들 좀 봐", "한심한 인간들 같으니!" 하고 말하더구나. 화가들에게서 그런 표현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래, 그런 일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사람들이 가장 진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스스로 자기 입을 막고 자신의 날개를 자르는 것이지. 어떤 사람들에게는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는 반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P.114
고흐는 인물화를 그릴 때 무조건 미화하지도 않았고 단순히 생김새를 똑같이 그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가장 그 사람답게 그리고자 했다. 사람들의 직업, 성격, 그들의 삶까지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어 했다. 그것이 곧 그림의 본질에 가닿는 길이라 믿었던 것이다. 농부에게는 거름과 흙냄새가 나도록 표현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들의 고된 삶이 묻어나는 거칠고 주름진 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고흐는 인물들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그들의 삶 자체를 화폭에 담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인물을 잘 표현한다는 것은 얼굴 생김새를 닮게 그리는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느낌을 전해주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얼굴 표현은 정말이지 싫다. P.117
농촌 그림이 베이컨, 연기, 찐 감자 냄새를 풍긴다고 해서 비정상적인 게 아니다. 마구간 그림이 거름 때문에 악취를 풍긴다면 훌륭하다고 해야겠지. 바로 그게 마구간이니까. 밭에서 잘 익은 옥수수나 감자 냄새, 비료 냄새, 거름 냄새가 난다면 지극히 건강한 것이다. 147
고흐의 인물화를 보면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얼굴을 클로즈업하거나 정적인 자세의 사람을 그린 초상화도 물론 있지만, 고흐의 많은 작품들 안에서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다. 바느질을 하는 노파,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 물레를 돌리는 여인,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농부, 이삭을 줍는 아낙 등. 고흐는 가장 그들 다운 장면을 포착했고 그것을 그리고자 했다. 그들이 생업에 집중하는 그 순간을 그리는 것이 가장 완벽하게 인물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인물이 더 이상 피상적이지 않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땅을 파는 사람이 땅을 파고, 농부가 농부답고, 시골 아낙이 시골 아낙다울 때다.
P.155
그러나 인물을 그린다면, 움직이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다. 움직임 자체를 위해, 그것을 포착해서 그리고 싶다. 관습적인 동작을 많이 그렸던 옛 거장들과 네덜란드 거장들조차 피하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움직임을 그리고 싶은 것이다. P.156
움직이고 있는 농부의 동작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현대 인물화가 해야 하는 일이다. P.160
고흐의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았다. 생각보다 작은 그림이었고 무척 어두웠다. 정말 어두운 조명 아래에 일을 막 마친듯한 사람들이 둘러앉아 감자를 먹고 있는 장면을 내가 작은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거 같았다. 화기애애애와는 전혀 거리가 먼, 입을 꾹 다물고 각자 조용히 감자만 먹고 있는 사람들. 침울함을 넘어서 뭔가 모를 엄숙함도 느껴지는 건 왜일까. 퀭한 얼굴, 그들의 지친 표정에 눈이 계속 갔지만, 정작 고흐가 표현하고자 하는 건 그들의 손이었다는 걸. 그림을 보고 온 저녁, 다시 넘겨본 책에서 알게 되었다. 이런 고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P.145
고흐는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아름다운 빛과 자연에 매료되었다. 아를의 드넓은 밀밭, 사이프러스 나무, 꽃이 핀 과수원, 붓꽃이 만발한 들판, 밤하늘의 별까지. 그의 마음을 울리는 모든 풍경을 캔버스에 담고 싶어 했다. 야외 작업은 꽤 어려운 일이었지만, 기꺼이 그 장소로 나가서 눈에 보이는 장면뿐 아니라 그 순간의 공기와, 바람과 냄새까지 표현하고 싶어 했던 고흐. 이 욕심 많은 화가는 유화를 그리면서 색채의 도움으로 그의 꿈에 한층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쨍한 태양 빛과 강한 바람을 느꼈으니, 그는 결국 그의 꿈을 이루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안에서 전에는 갖지 못했던 색채의 힘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아주 거대하고 강력한 어떤 것이었다. P.83
요즘 유화를 그리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자유를 얻는 느낌이다. 전에는 얻을 수 없었지만 결국 가장 내 마음을 끄는 성과를 얻게 해 주는 것이다. 유화는 내게 아주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원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할 새로운 수단을 준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나를 아주 행복하게 한다. P.86
색채를 통해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해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253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면서도 고흐가 잊지 않았던 것은 바로 ‘사람’이다. 해가 뜨는 밀밭에서 씨 뿌리는 농부, 붉은 포도밭에서 일하는 아낙들, 황금빛 밀밭에서 수확하는 농부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산책하는 연인들. 그가 그리는 풍경 속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고흐만큼 인간을 사랑한 화가가 또 있었을까?
나는 풍경화가는 아니다. 내가 풍경을 그릴 때도 그 안에 늘 사람의 흔적이 있다. P.59
빈센트 반 고흐는 진짜 어떤 사람이었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거처럼 괴팍하고 고집 센 예술가였을까? 뭐 그래도 상관없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 고흐가 진짜 고흐라고 생각한다. 고흐는 기존의 화가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그의 그림 실력이면 유명한 화가로 가는 더 빠른 길이 있었을 것이다. 성공과 인정보다는 스스로 믿고 있는 진실을 찾아 헤매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림을 통해 그가 사랑하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으며, 끊임없이 시도하고 고민했다. 노력을 몰라주는 세상에 때로는 좌절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받았을지라도 고흐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병이 그를 멈추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정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P.75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나의 목표다. P.119
분명 "웬 쓰레기 같은 그림이냐!'는 말을 들을 게 뻔하지만. 내가 각오하고 있듯 너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진실되고 정직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 P.147
훗날 그의 병이 그의 정신을 망가뜨렸을지 몰라도, 고흐는 누구보다 집념이 강하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희망을 가지고 정면돌파를 하는 용기를 가졌던 화가. 책을 읽으며 고흐를 이해했고 그림을 보며 고흐에게 감동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붓질 하나하나가 그의 단어와 함께 살아나는 거 같았다. 살아서는 사랑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고흐를, 고흐의 그림을 이해하고 사랑한다.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영혼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겨울이 지독하게 추우면 여름이 오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압도하는 거지.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냉혹한 날씨는 결국 끝나게 되어 있고, 화창한 아침이 찾아오면 바람이 바뀌면서 해빙기가 올 것이다. 이처럼 늘 변하게 마련인 우리 마음과 날씨를 생각해 볼 때,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P.17
나의 최종 목표가 뭐냐고 너는 묻고 싶겠지. 초벌 그림이 스케치가 되고 스케치가 유화가 되듯, 최초의 모호한 생각을 다듬어감에 따라, 그리고 덧없이 지나가는 최초의 생각을 구체화함에 따라 그 목표는 더 명확해질 것이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취되는 것이 아닐까? P.22
테오야, 나는 미래를 예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한다는 법칙은 알고 있다. 10년 전을 생각해 보자. 그때는 모든 것이 달랐지. 환경, 사람들의 분위기... 그러니 앞으로 다가올 10년 동안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의 작품은 남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더 적극적인 사람이 더 나아진다. 게으르게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느니 실패하는 쪽을 택하겠다. P.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