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아이에미 Oct 28. 2024

스마트폰 노예로의 여정, 그 시작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난 대체 언제 사줄 건데~!!”



초등학교 3학년 때엔 분명 필요 없다고 했다. 어느 날은 한껏 신이 나 강종강종 집에 와서는 같은 반 친구들이랑 만나서 놀기로 했단다. 언제, 몇 시에, 어디서 만나냐니까 모른단다. 응???


다음 날 학교 가서 물어보겠노라 다짐하고 갔지만 쿨하게 까먹고 그냥 돌아왔고, 그렇게 친구들과의 약속은 없던 일이 되었다. 처음이었다. 모태 집순이이자 '온실 속 잡초'같던 아이가 보호자 없이 친구들끼리만 놀겠다고 약속을 잡고 온 게.


‘우리 아이가 자랐구나’했다가 어김없이 ‘아직 자라려면 멀었구나’ 싶었다. 소문자 t인 아이는 자기가 까먹고 안 물어본 거라 어쩔 수 없다 했고, 대문자 F인 엄마는 마치 내 일인 양 가슴 한편이 자글자글해졌다. 스마트폰만 있었으면 친구한테 연락해서 물어봤을 텐데.


스마트폰이 공부에도 방해되고 아이들 생활습관은 물론 부모자식 관계까지 망치는 원흉 1위로 악명이 자자하다 보니 최대한  늦게 사주려고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으며 지내고 있을 때였다.




유리멘털 엄마는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사주겠노라 백기를 살랑살랑 흔들며 넌지시 말했다.


“괜찮아요. 난 덜렁거려서 스마트폰 떨어트리거나 잃어버릴 거 같아.”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때의 너는 메타인지가 되는 의젓한 어린이였구나. 굳이 필요 없다는 아이에게 쥐어줄 정도로 멘털이 털리진 않았기에 다시 정신줄을 부여잡았다.


가끔 준비물이나 실내화주머니를 두고 가거나, 컨디션이 안 좋아 조퇴는 해야 하는 긴급상황엔 학교에 있는 콜렉트콜로 전화하거나 선생님 통해 연락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나의 덜렁이 딸은 콜렉트콜을 자주도 써먹었다. 그래서 이젠 군대 간 남자 친구도 없고, 미련 절절했던 구남친의 생사도 모르는 아줌마가 된 나에게 콜렉트콜은 여전히 심쿵한 존재였다.


이따금 뜬금없이 전화해 "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라고도 했으니 심쿵하지 않을 수 없는 콜렉트콜이었다. 세상 스위트했던 너였구나!


그때 '나도 우리 딸 보고 싶어~ 사랑해♥'라는 말 대신 등교한 지 10분도 안 돼서 쓸데없이 전화했다고 타박하며 "돈 나간다, 끊어!"라 했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 딱콩 한 대.

으휴~ A.I도 그렇게 말 안 했겠다.




그렇게 스마트폰 없는 평온한 세월이 흘러 흘러 아이는 4학년이 되었다. 하루는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온 아이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엄마! 학교 콜렉트콜이 다 사라졌어! 이제 어떻게 하지?”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덜렁이, 정신줄 단단히 잡고 살자~."

아이가 입을 삐죽 거린다. 아… 오답인가 보다.

며칠 뒤엔 “엄마! 수업시간에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거 했는데 나만 없어서 못했어!!”라며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당장 담임선생님께 항의전화를 하고 싶었다. 내 자식 미운털 박힐까 봐 차마 전화는 못하고 ‘집에 공기계도 있는데, 준비물 안내가 없어서 아이에게 꼼짝없이 트집 잡혔잖아욧!’이라고 격앙된 어조로 내적항의를 해댔다.


"엄마! 피아노학원 차량 선생님이 폰이 없으니 나랑 연락이 안 돼서 불편하대!!!”

“엄마! 체험학습 가서 다들 QR코드로 사진 찍어 설명 보는데 나 못 봤어!!!!”


아이의 말투는 점점 늘어나는 느낌표의 개수만큼 까칠하고도 단호해져 갔다. 그렇게 아이는 스마트폰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요목조목 찾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3학년 때의 그날처럼 친구들과 방과 후에 만나서 놀기로 약속했단다. 이번엔 시간과 장소까지 정해서 왔다며 으쓱해했다.


“기특하네~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잘 다녀오렴!” 가벼운 마음으로 품 안의 자식을 배웅해 줬다.

 

30분쯤 지났을까. 아이가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30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친구들이랑 싸우기라도 한 건가?

영어로 질문할 것도 아닌데 어떻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어내느라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일단 우는 아이를 다시 품 안에 보듬어 안고 등을 토닥였다. 가까스로 진정한 아이가 한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OMG! 

Image by Manfred Antranias Zimmer from Pixabay


인내심 박약이라 차로 1시간이 넘는 곳으로 놀러 가려면 '아직 멀었어요? 나 '몇 분 더 가면 돼요?'와 같은 뉘앙스의 질문을 스무 번은 족히 하는(더 어렸을 땐 1분 단위로 확인했었으니 장족의 발전을 하긴 했다만) 아이가 30분을 기다렸으면 정말 영끌해서 참고 또 참았던 거였을 테니 얼마나 서러웠을꼬. 


다음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놀이터에 안 어? 나 30분이나 기다렸단 말이야!"하고 말했더니 학원 가는 걸 깜박해서 다른 친구들한텐 카톡 했는데 우리 아이는 폰이 없어서 연락할 길이 없다나?


결국 비슷한 상황을 두 번 겪고 나니 아이도 더 이상 괜찮지 않았나 보다. 짜증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사자후를 뿜어냈다.


 “난 대체 언제 사줄 건데~!!”


이쯤 되니 내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올 지경이었다. 엄밀히는 마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이러다 내 아이가 왕따가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결국 이렇게 나는 백기를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