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 계정 폭파하자."
지우나 마나 한 유튜브 어플 쟁탈전에서 보기 좋게 패배했지만, SNS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내 폰으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몰래 들어가 좋아하는 버추얼 아이돌 덕질하다 걸린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닌 밤 중에 받은 100개 넘는 메시지 폭탄의 내용은 참으로 허황되고 영양가 없었으며, 그들 사이에서도 못 믿는 분위기라 '주작이죠~'라는 댓글이 넘쳐났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해맑은 얼굴로 비속어의 뜻과 쓰임을 물어봤을 때, 안 좋은 말이니 알 필요도 없고 궁금해하지도 말라고 단호박처럼 말했는데. 오픈채팅방 속 세상은 슬럼가 그 자체였다. 그간 나에게 비속어의 뜻을 물어본 건 정말 몰라서가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도 어른들 앞에서 아는 것을 나불거리지 않은 너란 녀석, 칭찬해.
오픈채팅방서 만난 초등생에 성범죄 40대 징역 3년
'SNS 오픈채팅방에서...' 초등생 몸 사진 요구한 20대 징역형
초등생 성착취 등 범죄 온상 된 오픈채팅… 어릴수록 더 쓴다
또야? 눈 감고 뜨기가 무섭게 연일 오픈채팅방을 통한 초등학생 성범죄 소식이 쏟아져 나왔다.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를 키우다 보니 더 신경이 곤두서고 안타깝고 화가 난다. 아이에게 관련 뉴스를 보여주며 오픈채팅방은 익명성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너를 속일 수 있으니 사용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비슷한 이유로 SNS는 허락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근데 이 녀석, 이번에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친구들 중 몇몇은 이미 인스타그램과 틱톡을 하고 있단다. 오픈채팅방은 안 할 테니 인스타그램만은 허락해 달라고 만화영화 속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친구가 보내준 링크 속 영상과 사진을 보고 하트도 누르고 댓글도 달고 싶단다. 그래, 친구가 좋고 전부일 나이긴 하지.
평소 무뚝뚝한 딸아이의 눈빛 애교에 에미는 또 정신줄을 스르르 놨다. 나란 인간, 참 불치병이네. 그렇게 스마트폰 계약서 2조 4항이 수정되었다.
제2조 사용규칙
4항. 사용방법
오픈채팅 및 SNS(페이스북, X, 틱톡 등)의 사용을 금지한다.
인스타그램에 한해 일부 허용하며, 인물사진 및 개인정보를 함부로 게시하고 알리지 않는다.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디지털 시민교육, 디지털 리터러시 등의 이름으로 디지털 세상에서 안전하게 자신을 지키고,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도해 준다. 어떨 땐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 놀라고, 역으로 아이에게 신문물을 배우기도 한다. 너란 여자, 배운 여자니까 믿어보겠어.
Image by Gerd Altmann from Pixabay
함께 인스타그램 어플을 깔고 회원가입을 시도했다. 네이버, 카카오톡과 같은 보통의 어플들은 만 14세 미만일 경우 부모 동의를 거쳐 회원가입을 할 수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만 14세 미만이 인스타그램을 가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원칙적으로 가입이 불가능한 나이였다. 근데, 이상하다. 아이의 친구들은 어떻게 가입을 한 걸까? 이 의문이 풀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온 아이가 해맑은 얼굴로 자랑스럽게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여줬다. 잘은 모르겠는데 해외를 우회하는 방법이라고 했단다. 위로 중학생 언니를 둔 친구가 자기 언니에게 배웠다며 친절하게도 가입을 대신해줬다고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영리했고 대담했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를 저렴하게 구독하기 위해 해외를 우회하는 방법은 들어봤지만, 뭔가 영 찜찜한 FM성향 에미는 그냥 쌩돈을 내고 구독하고 있건만. 너는 겉은 물론 속도 날 안 닮았구나.
우여곡절 끝에 인스타그램 유저가 된 아이는 친구들의 사진에 하트를 누르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둠의 경로를 사용한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친구들과 소통하며 행복해하는 아이를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본인 계정에 아무 게시물도 없으니 스타벅스에서 산 음료 사진을 올려도 되냐고 허락을 구한 뒤, 유리잔에 본인 얼굴이 비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사진을 찍어 업로드한 아이. 자못 신중한 모습에 불안한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아이의 첫 게시물이자 마지막 게시물이 되었다.
며칠 되지 않아 인스타그램 관련 딥페이크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하- 첩첩산중이네. 나에게 있어 인스타그램은 그저 궁금하지도 않은 주변사람의 일상 과시용 사진앨범 혹은 인플루언서들의 정보성광고 딱 그 정도였기에 유해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 인스타그램을 그렇게도 이용한다고? 정말 쓸데없는데 지극정성이고 똑똑하고 자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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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학교 인근의 고등학교에서도 연루된 케이스가 있어 학교가 발칵 뒤집혔단 소식이 들려왔다.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뉴스에서 연일 보도되는 것은 물론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알리미로 피해접수 및 대처요령에 대한 공지알림이 왔다. 다시 아이를 불러 앉혀 뉴스를 보여줬다. 아이도 이미 학교 선생님을 통해, 친구들을 통해 이 사건을 접하고 왔다고 했다.
출처 Pixabay "인스타그램 계정 폭파하자."
"꼭 그래야 해요? 절대 내 사진 안 올리고
진짜 조심할게요~ 그냥 보기만 할게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해 줄 수 없었다. 애초에 정상적인 루트로는 가입조차 되지 않는 나이가 아니던가. 이렇게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걸 깨달은 이상 양보도 타협도 해줄 수 없었다.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고맙게도 아이는 더 이상의 투쟁 없이 제 손으로 계정을 폭파했다.
인스타그램발 딥페이크 사건이 터지고 청소년들의 SNS 사용, 스마트폰 중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고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공통된 화두였다. 이에 인스타그램은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청소년 사용제한 대책을 내놓았다. 아이들은 인권을 들먹이며 불 멘 소리를 하겠지만, 아이를 보호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부모로서는 반가운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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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년 1월부터는 우리나라도 이러한 조치의 영향권에 들어간다고 한다. 나이 먹기는 싫지만 내년이 반가운 이유 중 하나다. 물론 이거 하나만으로 세상이 밝고 아름다워 지진 않을 거라는 거, 무엇이든 막는 방패가 있다면 무엇이든 뚫는 창도 있다는 거 안다. 사후약방문일지언정 어른들이 SNS, 더 나아가 스마트폰의 중독성과 유해성을 인지하고 개선장치와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회로를 가동해 본다.
아이와 스마트폰 하나만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실랑이를 하다 보면 우리나라도 일부 외국 사례처럼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자체를 법적으로 제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경쟁하며 살아가야 할 아이들인데 덮어놓고 못하게 하는 것도 능사만은 아닌 것 같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지 않은가.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아이들도 경각심이 조금은 생겼을 테니, 이를 초석 삼아 디지털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과 정보 활용방법, 문제 해결방법은 물론 자기 통제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지켜보고 도와주는 게 어른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 자신부터도 힘든 자기 통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함께 허벅지 찌르는 심정으로 꾹 참아보자고요. 야, 너두!
아이는 계속 성장할 거고 언젠가 당당하게 청소년 계정을 만들겠다고 통보하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안다.(통보라도 해주면 감사하고, 차단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시대 흐름이 그렇고 청소년 문화가 그런데 어찌 함께 가지 않을 수 있겠어. 스스로 SNS와 스마트폰 사용을 적절히 컨트롤할 수 있는 절제력 있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옆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어린 조언(이라고 쓰고 갈굼이라고 읽는)을 해줄 수밖에.
쿨하게 제 인스타그램 계정을 폭파해 불시착한 종이비행기에게 아이는 속삭이듯 인사하지 않았을까.
언젠가 또 올 거니까 안녕은 안 해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