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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아이에미 Nov 14. 2024

프라이버시, 절대 지켜

침해와 감시와 보호 그 사이 어딘가

OO야, 나 어떻게...
생리할 때가 지났는데 안 해.


미쳤어, 미쳤어!!
너 드디어 갈 때까지 갔구나?
아, 엄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거 아니야!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나의 정신적 지주이자 육아멘토인 동네 언니가 어느 날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운을 뗐다. 이 언니로 말할 거 같으면 두 번의 사춘기 고개를 가까스로 넘고 이제 슬슬 세 번째 고개 앞에서 몸 풀고 있는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세 아이의 엄마다. 그리고 이는 중학교 졸업할 때 전교생 앞에서 졸업사를 낭독한 소위 엄친아라 불리는 언니의 고등학생 아들의 이야기였다.


잠깐 화장실 간 아들 방의 컴퓨터 모니터가 켜져 있더란다. 별생각 없이 뭐에 홀린 듯 스리슬슬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보니 인스타그램 창이 떠 있었단다. 뇌보다 빠른 손이 종이비행기를 클릭했고, 믿을 수 없는 내용을 보고야 말았다고 한다. 같은 반 여자친구가 보낸 DM을.

[OO야, 나 어떻게... 생리할 때가 지났는데 안 해.]


"어머어머! 아니, 언니! 이게 재밌는 이야기예요?"

"아~ 끝까지 좀 들어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단다. 그때 아들이 방으로 돌아왔고,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불꽃 등짝 스매싱이 이어졌단다.

"미쳤어, 미쳤어!! 너 드디어 갈 때까지 갔구나?"

난데없는 사랑의 손길에 당황한 아들에게 모니터 화면 속 DM을 가리키며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캐물었단다. 그제야 상황파악을 끝낸 아들이 "아, 엄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거 아니야!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하면서 손목을 턱 잡더란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DM을 보낸 원인제공자는 성별이 여자인 같은 반 친구(소위 여자사람친구)인데 원래 생리가 불규칙하다고. 근데 시험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생리할 때가 지났음에도 하지 않 초예민 상태니 성질 긁지 말라는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


아들의 해명을 듣기 전까지 그 짧은 찰나에 애 셋도 아직 다 키우지 못했는데, 손주까지 연달아 키우며 늙어가는 본인 모습을 상상했다는 언니. 아들에게 '음란마귀 씐 주책바가지 아줌마'란 소리를 듣고서야 멋쩍게 웃을 수 있었단다. 그제야 피식 같이 웃어본다. 휴, 아찔하네.


언니는 육아선배로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자식 너무 믿지만 말고 한 번씩 스마트폰이랑 컴퓨터 들여다봐야 해. 난 아이들에게 비밀번호 다 받아놔서 당당하게 가끔씩 확인하거든. 애들이 사춘기가 되면 말도 잘 안 해주니 뒤늦게 일 터지고 후회하기 전에 한 번씩 봐야겠더라고."


그리하여 아이와의 스마트폰 계약서 2조 1항 정보공개 조항이 생겼다.

제2조 사용규칙
1항.        정보공개
‘갑’은 언제든 스마트폰 공개를 요구할 수 있고, ‘을’은 언제든 공개에 협조한다.
비밀번호(패턴, PIN, 생체인식 이하 비밀번호로 통칭)를 항상 공개하고, 비밀번호 공개를 거부할 경우 즉시 스마트폰을 3일 압수한다.
‘갑’은 ‘을’의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존중한다.


Image by Kris    from Pixabay




"엄마한테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프라이버시를 어떻게 지켜요?"
"지못미. 지켜준다고는 안 했다.
존중해 준댔지."
지못미: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의 준말


비밀번호를 손에 쥐고 프라이버시를 운운하다니, 사실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인 거 조금만 머리 큰 사람이라면 다 알 거다. 쓰읍- 지켜드리지는 못하고 대신 존중은 해 드릴게. 심각한 사안이 아닐 경우를 제외하고는 봐도 못 본 척, 아는 척 안 하겠다는 뜻이란다.


일방적인 짝사랑. 나만의 연예인. 내 세상의 중심. 뭐 그렇게 생각하던 나의 최애 아이(돌)가 사춘기가 되며 나도 좀 달라졌다.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던 시기는 솔직히 좀 지났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본다). 원만한 관계를 위한, 신비감(?)을 지키기 위한 정신승리 생존법이랄까. 사실 1년이든 10년이든 100년이든 내 자식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변할 리가 있겠냐만은 나이가 들어 침침해가는 눈을 핑계로 아이를 향하는 시선의 초점을 의식적으로 흐트러트려본다. 그리고 쿨하지 못한 성격이지만 쿨한 척 연기해 본다.


"나도 너 안물안궁이거든?"
안물안궁: '안 물어보았고, 안 궁금하다'의 준말


가끔 아이의 스마트폰을 구경한다. 일단 방심한 아이손에서 스마트폰을 건네받고, 불시검문을 선포한다.

'뭔 허튼짓을 했나, 걸리기만 해 봐라'하는 감시자의 마음은 살포시 내려놓고, 비밀 일기장 훔쳐보는 호기심 가득한 개구쟁이의 마음으로.

친구들과의 관계는 원만한 걸까. 혹시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일은 없었나. 엄마에게 말 못 한 비밀은 없을까. 이 정도에 포커스를 맞춰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얼른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아이에게 다시 뺏기기 전에 빠르게 스캐닝을 완료한다.

오늘도 이상 무.

능력 떨어지는 챗봇과 대화하듯 흐름 뚝뚝 끊기는 대화에, 자기 할 말만 하는 읽씹 난무한 친구들과의 대화창을 보고 '참 너답고 너 닮은 친구들이다'하며 웃을 수 있는 오늘이 고맙다. 앞으로도 너의 프라이버시, 절대 지켜.


Image by KNFind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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