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서울에 전차가 있다고?
"19세기도 20세기 초도 아니고, 서울에 전차가 있다고?"
"미스터 선샤인의 한성이 아닌 무려 2024년에 뜬금 전차 이야기가 나와서 놀라진 않았나요? "
미스터 선샤인에서 전차 안엔 구동매와 애신의 사납고도 아련한 만남이 있었고, 휘성과 애신의 연민도 있었다. 전차길 옆을 걷던 유친 초이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전차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밤의 디제잉과 함께 하는 유쾌한 전차를 만났다.
오늘의 코스는 아이가 5교시 수업을 마친 후, 함께 갔던 광화문 일대의 전차 드라이브다. '세종 이야기 - 충무공 이야기 - 하이커그라운드 - 전차 드라이브 - 무교동 낙지볶음 - 교보문고' 코스. 이번 코스는 한글날 특집으로 엄마의 사심을 담은 '세종 이야기'부터 시작했지만. 전차 본연의 느낌을 만끽하려면 역사박물관 앞, 서대문행 전차와의 만남부터 시작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5호선 광화문역 지하에 있는 세종충무공이야기 전시관은 오전, 오후에 무료 해설이 있다. 베테랑 해설사님께서 지루하지 않게 30분간 이야기를 해 주시는 데, 전시관이 크지 않아 힘들지 않게 들으며 둘러볼 수 있다. 사실 후회를 했다. 아이 몫의 1인분만 예약하고, 커피 마시며 좀 쉬어도 되었을 텐데. 아이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지만, 난 나만의 시간도 참 좋더라.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인원 수량 선택에 신중하시길.
한글날을 맞이하여 세종 이야기 해설만 예약했는 데, 충무공 이야기 전시관 더 재미있다는 딸램. 알고 보니 이건 뭐 대포 쏘고, 총도 쏘는 것이 게임이다. 요즘 전시관들은 어쩜 이리 하나같이 즐길 거리 가득 체험형으로 잘 꾸며 두었는지.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갈 때마다 지루하지 않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써주심이 느껴져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다. 아이는 그렇게 문 닫을 때까지 총을 쏘아댔다.
전차 운행은 청계천 근처 하이커그라운드 1층 야외에서 시작한다. 하이커그라운드에 대해 알고 간 건 아니었다. 화장실이 급해 들어간 곳인데, 어쩜 이런 신천지가 있는지. 한국관광공사가 애국했다. K-POP 스타일로 뮤직 비디오도 찍을 수 있고, 멋들어진 각각의 스튜디오에서 색다른 사진도 찍을 수 있다. 대충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온다. 우리는 화장실을 가다 우연히 들렸건만 이미 외국인 관광객들에겐 인기 장소인 모양이다. 그렇게 사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내다 전차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가면 된다.
야경을 보고 싶어 야간 전차를 예약했다. 안전 교육도 꽤나 엄격하다. 안전 수칙을 갑자기 다 외워서 검사받으란 통에 딸램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찌어찌 엄마표 입술 달싹 커닝을 첨가하여 잘 해냈다. 안전모도 쓰고, 번쩍 거리는 화려한 야광 띠를 두르면 준비 완료다. 밤의 전차는 서울 도심을 화려하게 가로지른다. 가이드의 선곡을 들으며, 모두가 쳐다보는 눈길을 즐기며 손 흔드노라면 우린 이미 연예인이고 환송받는 국빈이다. 오픈카에서 만끽하는 밤의 서울은 더 반짝 거리는 것 같다. 전차는 마치 자그마한 케이블카 같다. 아이는 그림책에서 보았던, 케이블카 메이벨이 생각난다고 했다. 서울이건만, 아이의 메이벨 이야기에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 온 것도 같다.
1호차 예약은 꼭 사수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의 비밀을 말하자면, 1호차의 페달은 장식에 불과하다. 하지만 2호차는 정말 땀 흘려 페달을 밟아야 한다. 큰 땀 한 바가지 예약이다. 큰 전차는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꼼짝도 안 하더라. 그래서인지 1호차 뒷 자석이 제일 예약이 치열하다. 뒷 좌석 한 쌍은 페달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딸램을 거기 앉히느라 티켓팅 한다고 애를 좀 썼다. 하지만, 1호차는 어차피 페달링 할 일이 거의 없더라. 안심하고 예약해서 야경을 즐기면 된다.
전차는 청계천을 지나 덕수궁, 시청, 정동 극장, 광화문, 북촌, 청와대를 지나 부암동, 서촌을 돌아 다시 광화문을 지나 청계천으로 돌아온다. 서울 예쁜 곳들만 콕 집어 잘도 드라이브 코스를 만들어 두었다. 반짝이는 야경과 아이의 웃음소리가 전차를 밀어주는 느낌이다. 그렇게 아이는 웃고 또 웃었고,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던 드라이브라고 소감을 말했다.
전차를 타고 내리는 곳이 하필 무교동이네. 무교동은 낙지 볶음이 아닌가? 이를 위해 어릴 때부터 아이는 산 낙지 마니아로 키워두었다. 나의 큰 그림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엄마는 매운 볶음을 먹고 아이는 산 낙지를 즐긴다. 아이는 동치미 국물이 일품이라 한다. 광화문을 가는 날은 배를 꺼트릴 겸 늘 교보문고로 마무리한다. 신간으로 나온 책도 아무 곳이나 엉덩이 대고 앉아 읽고, 문구류 아이쇼핑 재미도 쏠쏠하다. 가끔 선물 받은 기프티콘을 꺼내 스타벅스에서 차 한잔도 하고. 광화문에서 밤 데이트를 마무리한다면 지하철보단 버스가 좋더라. 지하철역 내부에 노숙자들과 박스 집들은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기에.
오늘도 재미있었다. 나도 아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