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교육에 있어 독서가 중요하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 그러나 쉽지 않다. 알고도 적용하기가 힘든 것 중 손에 꼽자면 세 손가락 안에 들 텐데. 그래서 많은 독서 전문가 분들이 각양각색의 방법을 내놓으신다. 한참 아이의 정독과 다독 사이에 고민이 많았던 때, ‘슬로우리딩’에 관한 책을 읽으며 오, 이거야! 했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천천히 조금씩 시간을 두고 함께 읽는 거다. 이 정도면 나도 이끌어 갈 수 있겠다, 한번 해보자. 이렇게 엄마교육의 첫 번째 시도가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지나고 보니 호시절이었다.
엄마 말이라면 내용은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저 받아주고 따라주던 시절. 나는 큰아이에게 슬로우리딩을 제안했다. 역시나, 아이는 그저 받아주고 따라주었다. 우리의 첫 책은 선덕여왕이었다. 그녀에 대한 특별한 애정 혹은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어쩌다 눈에 들어온 책이 그것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 책이나 눈 감고 집어든 건 아니었다. 엄마인 나의 의도가 반영된, 하지만 아닌 척하며 선택한 응큼함. 실은, 내가 궁금했다. 아이가 선덕여왕에 관해 알기를 바라는 마음은 당연히 있었지만 내가 궁금하다는 점도 선택의 큰 이유였다. 위인전 속에는 위인들의 남다른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와 알려지지 않은 업적들이 담겨 있는데, 부끄럽게도 난 잘 모를 때가 많다. 이참에 나도 좀 알고 가자. 그렇게 우린 느린 손길로 책장을 펼쳐 슬로우리딩을 시작했다. 선덕여왕, 와우 초반부터 흥미진진했다. 당나라 사신이 보낸 그림을 보며 덕만(선덕여왕의 본명)은
이 모란꽃은 크고 화려하지만 향기가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벌과 나비가 없기 때문이다.
두둥. 여기서 무릎을 탁 쳤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이렇게 예리하게 포착할 줄이야. 총명함은 바로 이런 것일 테다. 大신라의 첫 번째 여왕임을 세계 어디에 알려도 자랑스러울 것 같았다. 이 일화로 나는 모란꽃은 크고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껏 실물 영접을 하지 못했음에도 향기가 없는 꽃이란 사실만큼은 제대로 내 머릿속에 박혔다. 아마 아이도 그랬으리라.
슬로우리딩은 그렇게 몇 권을 더하고서는 큰 아이의 책 읽기 습관을 잡아주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둘째 아이가 있었음에도 힘에 부친다는 핑계로, 나는 이미 한번 제대로 읽어서 알고 있다는 이유로 함께 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 둘째 아이의 부실한 독서습관은 엄마의 부실한 노력 탓일 게다.) 그렇게 모란꽃은 자연스럽게 점점 잊혀갔다.
현재 나는 40년이 넘은 구축아파트에 살고 있다. 구축아파트 단지 내의 화단은 관리의 손길이 끊겨 영 볼품없지만, 봄만 되면 신축아파트에서는 절대 맡을 수 없는 진한 라일락 향을 선사한다. 그 향에 취해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서 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내가 다 가진 마냥.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엔 향기가 아닌 내 시선이 멈췄다. 사과만큼 크고 탐스러운 송이가 군데군데 달려있고, 색은 세상 본 적 없는 진한 자줏빛의 꽃송이, 누가 봐도 곱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꽃이 피기까지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크게 폈을까. 그 순간 이상스럽게도 온몸에 전율이 왔다.
호,호,혹시... 모란이세요?
모란이란 생각에 문득 지난 슬로우리딩의 선덕여왕 일화는 불현듯 떠올랐고, 나는 자동적으로 꽃송이에 코를 댔다. 보통은 벌이 무서워 화단 근처도 못 가는데, 모란이라는 이유 모를 확신에 그냥 몸이 움직였다. 벌과 나비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스마트폰 유저. 스마트렌즈를 들이대니 빙고~ 모란이다! 그 순간 나는 호들갑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서 만났던 그 꽃을, 잊혀갔던 기억 속의 그 꽃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찰칵찰칵, 다각도로 사진을 찍어 온 동네방네 알렸다. 그러나 나의 흥분 상태를 누가 이해하겠는가. 함께 선덕여왕을 읽은 큰 아이의 반응도 떨떠름한데. 그럼에도 나는 신기한 보물을 찾은 것 마냥 기뻤다. 도시의 그 어떤 화단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모란을 내가 봤다니까. 심봤다! 구축아파트가 주는 봄의 선물임을 나만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