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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나 : 숲의 수호자들 (25편)

밤의 숲 요새

by 아르망

서막: 밤의 숲 깊은 곳으로


강철 소리로 가득했던 추격의 소음이

먼지처럼 스러진 자리,

그들을 맞이한 것은 바람을 타고 흐르는 숲의

부드러운 속삭임이었습니다.


아, 밤의 숲.

얼마 만에 안겨보는 고향의 숨결인가.

숲은 수천 개의 푸른 손을 뻗어,

지친 나그네들을 기꺼이 품어주는

거대한 요람이 되어주었습니다.


어제의 밤을 머금은 달빛이 축축한 이끼와

젖은 흙의 향기마저 신비롭게 어루만졌고,

별빛의 조각들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

숲 전체가 눈부시게 반짝이는 보석의 밭 같았지요.


공기 중에 밴 짙은 싱그러운 흙냄새는,

비로소 뿌리내릴 땅을 찾은 안도감을 선사했고,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품은 고목들의 묵직함은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듬직하게

일행들의 어깨를 감쌌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격렬하게 뛰던 심장이

숲의 느리고 깊은 맥박에 맞춰

천천히 가라앉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잊었던 자장가에

스르르 잠겨들 듯,

숲의 평화와 하나가 되었지요.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칼날 위에 맺힌 이슬 같았던 짧은 평안이

어느새 땅에 툭 떨어져 버리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숲의 장막 너머에는

수십 개의 차가운 눈빛이

번뜩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더욱 많은 그림자들이 나타나더니,

자경단을 향해 날카로운 무기를 겨누며

경계 태세를 취했습니다!


이들은 바로 루인의 명령으로

먼저 이곳에 도착해 있던

그의 친위대, '붉은발톱군단'의 병사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모두를 짓누르던 그 순간,

쿵!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그림자 하나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새벽의 어스름한 빛 사이로 그 얼굴이 드러나자,

칼날 같던 병사들의 경계심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지요.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무기를 거두고

강철처럼 굳건한 차렷 자세를 취했습니다.

돌아온 군단장, 루인을 알아본 것입니다.


"내 전사들의 눈빛... 마음에 든다."

루인의 목소리는 짧게 울렸지만,

그 어떤 긴 문장보다 병사들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여기 있는 이들은 내가 제군들에게

돌아오는 길을 함께

열어준 고마운 동료들이다.

이제 그 칼끝은 거두어도 좋다.

우리를 가장 깊은 곳으로 안내해라.

그리고 가서, 나의 형제들인 지휘관들에게 전해라.

군단장이... 돌아왔다고."


"네.. 넷!!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자경단과 함께 있는

루인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의 위엄 서린 목소리에 즉시 길을 열고

일행을 깊숙한 숲 속으로 안내했습니다.



1. 시간의 먼지가 내려앉은 곳


새벽의 푸른빛이 숲의 검은 장막을 걷어내자,

마침내 그들의 눈앞에 익숙한 풍경이 드러났습니다.


이끼와 담쟁이덩굴에 반쯤 몸을 내어준

거대한 천연 동굴 요새.

자경단의 옛 본부.

한때 그들의 웃음과 맹세,

그리고 동료들의 땀이 스며들었던 자경단의 심장.


"돌아왔구나..."

리나의 목소리는 새벽 공기 속에

아련히 흩어졌습니다.

그녀의 손길이 입구를 지키는 떡갈나무 문 위,

희미하게 남은 자경단의 흔적을 쓸어내렸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먼지가

그녀의 손끝에서 무심하게 묻어 나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시간의 두께가 사뿐히 내려앉은 공간이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바르크가 훈련 때마다 주먹으로 두들겼던

훈련용 통나무는 부러진 채 구석에 쓰러져 있었고,

릴리가 벽 한쪽에 장난처럼 그려놓았던

늑대 그림은 색이 바래

희미한 얼룩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제의 일처럼 선명했습니다.

십 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무색할 만큼.



2. 던져진 검, 새로운 맹세


그들의 감회가 채 가라앉기도 전,

루인의 부름을 받은 수십 명의

붉은발톱군단 지휘관들이

요새의 심장부 안뜰로 모여들었습니다.

횃불이 그들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오랜만이군, 카엘."


루인의 나직한 목소리에 맨 앞에 있던

지휘관의 눈이 번뜩였습니다.

그는 루인이 직접 발탁했던 유능한 부관이었습니다.


자경단과 함께 있는 옛 주군의 모습에

모든 지휘관의 얼굴에 경악과 혼란이 뒤섞였습니다.


"총... 총사령관님...! 어찌하여..."


"내가 왜 배신자가 되어

너희 앞에 섰는지 궁금하겠지."


루인은 허리춤의 칼을 뽑아 바닥에 던졌습니다.

쩌렁-! 하는 쇳소리가 동굴 전체를 울리며

모두의 심장을 꿰뚫었습니다.


"저 칼은 카르에게 바친 나의 충성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충성을 바친 카르는...

이제 없다!

도시에서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가 그 증거다.

이제 자신의 옥좌에 집착하는

광기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가 아닌,

차가운 진실의 무게를 담고 있었습니다.



"카르는 너희의 발톱과 이빨을 이용해 배를 채우고,

싫증 나면 가차 없이 버릴 것이다.

바로 나처럼!"


"너희는 더 이상 폭군의 사냥개가 아니다!

우리의 땅, 밤의 숲을 지키는 긍지 높은 붉은발톱군단이다!"


루인은 한 명 한 명의

눈을 꿰뚫어 보며 외쳤습니다.


"나는 옛 주군으로서 명령하지 않겠다.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동료로서 묻는다!


어둠의 불꽃에 이용될 검은 기름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나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여는

거대한 불길이 될 것인가!


너희의 검은,

이제 너희 자신과 이 숲을 위해 휘둘러라!

나에게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하고,

숲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

저 어리석은 폭군에게 똑똑히 보여주자!"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공간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지휘관 카엘이 무릎을 꿇고 외쳤습니다.


"총사령관님의 검이 향하는 곳에,

저희의 충성이 함께할 것입니다!"


그의 외침을 시작으로,

모든 지휘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검을 내려놓았습니다.


땅에 닿은 것은 배신자의 무릎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지도자에게 바치는

가장 묵직한 충성의 맹세이자,

장엄한 새 여정의 주춧돌이었습니다.



3. 광기에 휩싸인 도시


지하 수로에서 빠져나온 카르가 마주한 것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에서는 그의 죄악이 적힌 종이들이

눈처럼 흩날렸고,

사방의 확성기에서는 과거 자신이 내뱉었던

잔인한 명령들이

유령의 메아리처럼 도시를 떠돌았습니다.


카르도 처음에는 회유를 택했습니다.

그는 중앙 광장 연단에 올라,

상처 입은 아버지의 얼굴로

모든 것이 비열한 술수라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더 많은 빵과 화려한 축제를 약속하며

흔들리는 민심을 다독이려 했습니다.


바로 그때, 군중 속에서 날아온 전단지 하나가

그의 뺨을 스쳤고,

한 용감한 청년이 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거짓말쟁이!"


그 한마디는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카르의 얼굴에서 온화한 가면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의 눈동자에서 자애로운 빛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분노가 소용돌이쳤습니다.


그는 청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얼음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령했습니다.


"저 자를… 당장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감히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가

어떻게 되는지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주어라!"


그날 이후, 블롯의 하늘은

어두운 먹구름으로 뒤덮였습니다.

거리는 비늘이빨단의 군홧발 소리와

공포의 침묵만이 지배했습니다.

밤이 되면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고,

여러 명이 모여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소리 없는 불시검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도시는 거대한 감옥이 되었고,

카르는 더 이상 시장이 아닌,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제물로 바칠 준비가 된 폭군이 되어갔습니다.



4. 불꽃 속에서 피어나는 작전


밤의 요새, 그 심장부인 거대한 중앙 홀은

세월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무너져 내린 천장 사이로 밤하늘의

차가운 별빛이 쏟아졌고,

그 아래 피어오른 모닥불만이 지친 영웅들의 얼굴에

온기를 더하며 살아있는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고요한 공기를 먼저 가로지른 것은

낡은 양피지처럼

차분한 알루스의 목소리였습니다.


"우리가 뿌린 씨앗이 블롯의 성벽 안에서

자라나기 시작했소.

우리는 시민들의 마음속에 '의심'이라는

뿌리를 내리게 했지.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그의 힘의 원천인

'돈줄'이라는 줄기를 잘라냈소.

이 숲에서 나는 '밤'은 카르의 군대를

먹여 살리던 가장 굵은 핏줄이었지.

이제 그 핏줄은 우리가 쥐고 있소.


뿌리가 썩고 줄기마저 잘린 나무는,

결국 거대하게 무너져 내리는 법이지."


알루스의 희망 섞인 말에 홀 안의 공기가

잠시 따스하게 데워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온기를 견딜 수 없다는 듯,

바르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의 얼굴은 격한 감정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요.


"그럼 우리는 왜 여기서

모닥불이나 쬐고 있는 거지?

루인의 군대까지 합세한 지금이 기회 아닌가!

당장 이 기세로 블롯으로 진격해

카르를 해치우자고!!"


그것은 지략보다는 심장으로 싸워온 전사,

바르크다운 가장 단순하고도 뜨거운 외침이었습니다.


화톳불의 불씨처럼 격앙된 바르크를 보며,

루인이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를 제지했습니다.


"바르크, 그대의 검은

적의 심장을 향해야지,

부술 수 없는 벽을 향해서는 안 된다.

블롯의 성벽은 숲의 나무와는 결이 다르다.

저 성벽은 우리 형제들을 삼키려고

서 있는 괴물과도 같지.

나는 내 전사들의 목숨으로

그런 무모한 도박을 할 생각이 없어.

성 안의 비늘이빨단은 바로 그런

어리석음을 맛보기 위해 길러진 사냥개들이니까."


루인의 말을 받듯,

리나가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하며

서늘한 속삭임을 더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모닥불의 열기마저

식혀버릴 듯 차가웠습니다.


"루인의 말대로야.

설령 우리가 피의 강을 건너 성벽을 넘는다 해도,

그 뒤에 펼쳐질 시가전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잿더미가 된 도시와

죽어간 시민들의 원망 속에서 승리를 외치게 될 거야.

그건 카르의 폭정 위에

또 다른 폭정을 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알루스 또한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맞네. 진정한 승리는 성벽을

'밖에서' 부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우리를 위해 성문을

'안에서' 열게 만드는 것일세."


그제야 바르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습니다.

정면 공격이 왜 불가능한지,

왜 그래서는 안 되는지를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기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리나가 모두를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단호한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습니다.


"의심의 씨앗만으로

단단한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고,

돈줄을 끊는 것만으로

굶주린 야수의 이빨을 뽑을 수 없어."


리나는 타오르는 불꽃의 가장 깊은 곳,

그 검붉은 심연을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홀 안의 모두에게 깊이 있게 스며들었습니다.


"카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잔인하고 교활해.

우리가 불꽃 속에서 다음 작전을 짜는 동안,

그는 더 깊은 어둠 속에서

우리의 심장을 꿰뚫어 보고 있을 거야.

그는 반드시,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반격해 올 거야."


그녀의 말에 희망으로 타오르던 모닥불의

기세마저 한풀 꺾이는 듯했습니다.

미지의 위협이 차가운 냉기가 되어

홀 안을 감돌았습니다.

리나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습니다.


"밤의 숲을 되찾은 것은 시작일 뿐이야.

아직 도시를 둘러싼 나머지 다섯 개의 숲이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


그녀의 눈이 결의로 빛났습니다.


"각 숲에는 카르에게 불만을 품은 이들이나

우리가 포섭할 수 있는 세력이 분명 존재할 거야.

만약.. 그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리나의 마지막 말은 홀 안의 공기 속에 무겁게,

그러나 분명한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갔습니다.


이제 막 하나의 산을 넘은 그들 앞에,

더 거대하고 험준한 산맥 같은 다섯 숲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피워 올린 불꽃의 온기가 닿지 않는

저 먼 산맥 너머에서,

차갑고 거대한 잿빛 그림자가

그들의 등 뒤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블롯의 가장 깊은 어둠 속.

텅 빈 옥좌에 홀로 앉아 있던 카르의 앞에는

거대한 지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방 안의 촛불들이 그의 뒤틀린 분노에

겁을 먹은 듯 위태롭게 흔들렸고,

그 그림자는 마치 거대한 괴물처럼

벽을 뒤덮었습니다.


그는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천천히 쓸었습니다.


자경단이 점령한 밤의 숲을 경멸하듯 지나,

지도 바깥의 아득히 먼 서쪽,

릴리의 고향인 바람의 숲을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톱니 같은 봉우리들이 그려진

잿빛 산맥에서 마침내 멈추었습니다.


거미가 먹잇감을 향해 조용히 거미줄을 치듯,

그의 손가락이 숲을 향한 침공로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습니다.

희열이 아닌,

모든 것을 파괴할 자의 차가운 확신만이 담겨 있는.


"그래...

이제 새로운 사냥매를 풀어놓을 시간이군."


그는 창밖의 어두운 도시를 내려다보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습니다.


"잿빛 날개들을."


(다음 편 이야기 '도토리 숲과 잿빛 그림자'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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