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숲과 잿빛 그림자
블롯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장부,
텅 빈 옥좌에 앉은 카르의 그림자가 촛불에 일렁이며
벽을 집어삼킬 듯 거대하게 피어올랐습니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전령에게,
밀랍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습니다.
"가서, 나의 새로운 날개들을 깨워라."
전령은 고개를 조아리며 복종을 표하고는,
연기 한 올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세상을 자신의 발밑에 두려는 뒤틀린 의지뿐.
그렇게 어둠의 두루마리는 바람의 숲 너머,
세상의 모든 색이 바랜듯한
황량한 산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늘조차 숨 쉬기를 포기한 듯한 그곳.
메마른 바람만이 정처 없이 떠도는 삭막한 땅.
칼날 같은 봉우리들이 구름마저 흩어버리는 그곳은,
과거 바람의 숲에서 추방당한 하늘의 약탈자,
'잿빛 날개' 들의 영토였습니다.
그들에게 전해질 두루마리 안에는,
피처럼 검붉은 잉크로 쓰인 글자들이
타오르듯 새겨져 있었습니다.
잿빛 날개들이여, 계약의 때가 왔다.
그대들의 날개를 꺾었던 바람의 후예들이
땅 위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이제 그대들의 날카로운 발톱과 강철 같은 부리로
복수의 폭풍을 일으킬 시간이다.
산맥을 넘어라.
저들의 푸른 숲 위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들의 비명으로 계곡을 채워라.
그리하면 약속된 숲과,
잃어버렸던 하늘을 그대들에게 돌려주겠다!
그 시각 밤의 요새.
타닥, 하고 장작 타는 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부드럽게 깨우는 가운데,
지친 전사들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상처를 보살피고 무기를 닦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진정한 평화를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노련한 지휘관들의 얼굴에 서린 팽팽한 긴장감은
이 고요가 폭풍 전야의 침묵이며,
이것은 끝이 아닌 거대한 전쟁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야수는 언제나 두 가지를 찾고 있지.
굶주린 배를 채울 먹이와,
상대의 숨통을 끊을 급소.
카르에게 그 두 가지는 바로 이곳이야."
리나의 손끝이 지도 위의 한 점,
'도토리 숲'을 단호하게 짚었습니다.
"도시의 혼란을 잠재우고 숨을 고른 카르가,
그 굶주린 이빨을 가장 먼저 드러낼 곳.
바로 우리 앞이라는 뜻이야."
그녀는 동료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습니다.
그녀의 눈빛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분명한 확신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즉시 루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우리가 머뭇거리고 있는 이 순간들이,
카르에게는 기회입니다.
단 한순간의 여유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진격해야 합니다!"
동이 트기 직전,
세상의 모든 빛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기도 전에,
작전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루인의 붉은발톱군단과 자경단 연합군은
새벽의 첫 안개가 숲의 허리를 감싸 안듯,
소리 없이 도토리 숲으로 녹아들었습니다.
숲은 그들의 오랜 친구이자,
그 어떤 칼과 방패보다도
견고한 무기였으니까요.
발밑의 마른 잎사귀 하나 바스러뜨리지 않는 발걸음,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구분되지 않는 움직임.
반면, 도토리 숲을 점령한 카르의 군대는
오만한 약탈자의 여유에 흠뻑 취해 있었습니다.
등 뒤의 밤의 숲이 철옹성이라 믿었고,
블롯의 주인인 카르의 권세가 영원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주민들에게서 빼앗은 술과 음식으로
밤새도록 벌인 연회의 기름진 웃음소리가 진지 곳곳에 널려 있었고,
그들의 경계심은 새벽녘의 잿불처럼
미약하게 사그라든지 오래였습니다.
그들은 아직 몰랐습니다.
바로 어제,
밤의 숲에서 주인이 바뀌었다는 진실을.
그리고 그들의 군주 카르가,
지금 블롯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시민들의 분노에
발목이 단단히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도시의 혼란은 전선으로 향하는
모든 통신과 보급을 마비시켰고,
족제비 부대는 완벽한 정보의 섬에 고립된 것입니다.
리나와 루인은 바로 그 절묘한 시간의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적들의 무지야말로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그들에게
가장 완벽한 무기가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리나의 손짓이 허공에 솟아오르자,
나무 위와 덤불 속에서 잠복하던 자경단원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여
적의 보급 마차를 불태우고 망루의 밧줄을 끊어버렸습니다.
혼란에 빠져 허둥대는 적들의 심장부로,
루인의 붉은발톱군단이 강철의 파도처럼 무섭게 돌진했습니다.
싸움은 일방적인 사냥에 가까웠습니다.
새벽의 붉은 빛이 숲을 신비롭게 물들일 무렵,
도토리 숲에 오만하게 나부끼던 카르의 깃발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습니다.
강철이 부딪히는 소음이 멎고,
그 자리를 붉은발톱군단의 승리의 함성이 채웠습니다.
나뭇잎에 맺힌 아침 이슬까지 뒤흔드는 우렁찬 외침이었지요.
하지만 그 함성은
거대한 숲 속 나무 아파트들의 창문 너머에는
승리의 노래가 아닌,
되살아난 악몽의 울부짖음으로 가닿았습니다.
공포에 질린 주민들이
조심스레 열어본 창문 밖으로 비친 모습은,
자신들의 집을 무참히 습격하고,
아이들이 겁에 질려 울부짖는 앞에서
한 해 동안 모은 소중한 도토리를 빼앗아갔던
바로 그 '붉은발톱군단'의 깃발과 갑옷.
열렸던 창문들은 소리도 없이 다시 굳게 닫혔고,
숲나무 아파트의 문들은 더욱 무겁게 걸어 잠겼습니다.
승리한 군단의 환호성은 이내 잦아들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칼을 맞대고 싸워야 할 적군이 아니라,
그 어떤 성벽보다도 단단하게 마음을 걸어 잠근
차가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으니까요.
바로 그때, 그 얼어붙은 정적을 깨고 토리가 나섰습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투구를 벗어 던지고,
주민들이 모두 알아볼 수 있도록 얼굴을 드러내며 외쳤습니다.
"어... 저 다람쥐는?
얼마 전에 새로 이사 와 살던 그 다람쥐 아저씨 아니야?"
"맞아.. 저분이 어째서 저들과 함께..?"
"우리를.. 돕기 위해 돌아왔다고..?"
익숙한 토리의 얼굴은 굳게 닫힌 주민들의
마음 문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웅성거림과 함께 주민들이 하나둘씩 조심스럽게
집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군단을 이끌고 온 루인이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듯,
모든 병사에게 무기를 내리고 투구를 벗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강철의 숲 같던 군단이 순식간에
고개 숙인 전사들의 무리가 되었습니다.
루인은 주민들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습니다.
꾸밈없는 진심 어린 사죄에,
주민들의 마음에 채워져 있던 굳건한 빗장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민들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본
토리는 리나와 짧게 눈빛을 교환한 뒤
곧장 숲의 변두리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둘의 머릿속은 오직 아이들과
토끼 부부의 안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행히 숲의 중심부에서 벌어진 전투의 소음이
미치지 않은 변두리 오두막에서,
토끼 부부는 아이들을 품에 꼭 안고
가구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토리는 아이들을 품에 와락 끌어안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아이들의 온기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평화였지요.
그가 돌아온 숲의 중심부에서는,
과거의 상처와 새로운 신뢰 사이에서 망설이던 주민들과
붉은발톱군단의 어색하고도 조심스러운 화해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한 병사가 자신의 물통을 겁에 질린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건네고,
한 주민이 부상당한 병사의 팔에 약초를 발라주는,
작지만 아름다운 풍경들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블롯의 심장부, 카르의 옥좌.
보고를 마친 전령이 엎드린 채
미동도 하지 못하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는 카르의 손에 들린
값비싼 유리잔이 내는 위태로운 비명이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한 유리잔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습니다.
붉은 포도주가 그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려,
옥좌의 팔걸이를 천천히 적셨습니다.
도토리 숲의 주둔군이 모두 도망갔다는 사실,
숲 전체가 자경단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신의 충직했던 사냥개,
루인이 있었다는 사실.
보고서의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뇌리에 박히는 독침처럼 느껴졌습니다.
"감히.. 감히 나의 정원에 발을 들여?"
그는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촛불에 일렁이는 그의 그림자가 방 전체를 집어삼킬 듯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습니다.
"본보기를 보여주지.."
그의 목소리는 이제 그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아
더욱 소름 끼치게 들렸습니다.
그날 저녁, 도토리 숲에는
오랜만에 따스한 모닥불이 피어올랐습니다.
어색했던 분위기도 잠시,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부드럽게 채웠고,
숲의 주민들은 서로 음식을 나누며 조심스럽게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리나는 아이들을 품에 안고,
비로소 한 명의 전사가 아닌 엄마로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이
이 작은 모닥불 너머로 아득히 멀어진 듯한,
짧고 아름다운 꿈결 같은 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 꿈결을 찢기라도 하듯 루칸의 정보원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습니다.
"불타버린 숲의.. '새싹들의 보금자리'가..
파괴되었습니다!
우리의 희망이던 어린 나무들이 모두 뽑혀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르크의 얼굴이 순간 가파른 절벽처럼 굳어버렸습니다.
축제의 온기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연이어 도착한 정보원들은 각기 다른 불길한 소식들을 전했습니다.
"바람의 숲 가장 높은 봉우리에,
하늘의 숨통을 조이는 거대한 감시탑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로운 시야가 강철의 감옥에 갇히고 있습니다!"
"그림자의 숲에 현상금이 붙었습니다!
주민들이 서로 의심하고,
서로를 사냥하기 시작했습니다!"
"약초의 숲이.. 마구 약탈당하고 오염되고 있습니다!
족제비들이 약초들을 다 가져가고
그 자리에 역한 액체들을 부었습니다!"
릴리의 손은 어느새 활을 꽉 쥐고 있었고,
벨라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습니다.
루칸의 얼굴에는 깊은 그림자가 더해졌고,
모닥불 앞에 서 있던 리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습니다.
짧았던 승리의 축제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리나는 미동도 없이 불꽃을 응시하다,
단호하게 돌아섰습니다.
"카르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고향을
하나씩 부수며 공포를 심고 있어.
그렇다면,
우리도 각자의 심장을 지키러 가야 해."
그들의 첫 번째 승리는,
그렇게 더 거대한 전쟁의 서막을 장엄하게 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피워 올린 전쟁의 연기가 바람을 타고 실어 나른 것은,
단순히 카르의 분노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저 멀리 잿빛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
칼날 같은 바위 왕좌에 앉은 잿빛 날개의 왕,
'라크'는 서리보다 차가운 눈으로
동쪽 하늘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 이 황량한 땅으로 내쫓기던 그날의 치욕.
그리고 가슴속 상처처럼 영원히 아물지 않을 그 이름,
여명의 깃털 '아라'.
그녀가 쏜 단 한 발의 화살에 꿰뚫려 추락하던 하늘,
그날 꺾여버린 날개는
지금도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카르가 보낸 두루마리가 그의 발치에 떨어졌습니다.
"마침내.. 때가 왔다."
라크의 부리에서 비틀린 미소가 새어 나왔습니다.
이윽고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울릴 듯,
쇠를 긁는 날카로운 포효가 터져 나왔습니다.
산맥 전체가 그 서슬 퍼런 외침에 화답하듯,
수천의 바위틈에서 잠들어 있던 잿빛 그림자들이
일제히 깨어나 날갯짓을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날갯짓은 잊혔던 분노를 위한 것이었고,
또 다른 날갯짓은 빼앗겼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수천의 날갯짓은 거대한 폭풍이 되어,
잃어버린 하늘을 되찾기 위해 동쪽으로 날아올랐습니다.
(다음 편 이야기 '흩어진 불꽃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