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나인채로 머무를 수 있는 곳
혹시 동굴이 있으신가요?
자랑 아닌 자랑 같지만 저는 있습니다.
그럴싸한 부동산 자산은 아니어도 언제든 내키면 갈 수 있는 별장 같은 동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나 내 앞에 높인 상황을 견디기 힘들 때 동굴을 파고 들어간다고 하죠.
저는 시커먼 땅굴같이 어두컴컴하고 습한 동굴 대신 양지바르고 새소리가 정겹게 들리는 곳에 첫 동굴 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들러 새 단장을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곱절씩 자라고 있는 잡초를 뽑기도 합니다.
오늘은 여러 해동안 열심히 가꾼 제 동굴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동굴을 언제 만들었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니 유난히 동굴에 오래 머물렀던 어린 시절의 한 토막이 떠오릅니다.
5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춘기가 빨리 온 친구들 틈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던 중이었어요.
첫째로 태어나는 바람에 둘째나 막내들보다는 눈치가 부족하다 보니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친구 관계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호랑이들 사이에서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비실한 개처럼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 같아요.
당시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은 소위 잘 나가는 무리였는데 어린 시절의 저는 그런 아이들을 꽤나 동경했나 봅니다. 이분법으로 친구들을 나눈 뒤 선택했던 그룹이었지만 제게는 너무도 버거웠습니다.
예견된 수순이었을까요. 저는 가을의 끝자락즈음 친구들에게 내쳐짐을 당하게 됩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는 몰라도 물리적인 폭력은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학기가 끝날 때까지 투명인간 취급을 당해야 했습니다.
지구가 저만 빼고 도는 느낌이었어요.
점심시간이 되면 더 괴로웠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너도나도 스틸식판과 수저를 열심히 부딪고 있는데 저는 혼자 동그마니 앉아 국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힘들었어요.
교실 속 외딴섬이 되어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섬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직전,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저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동굴 속은 먹물을 뿌려놓은 듯 캄캄했습니다. 그곳에서 더 있다가는 어둠 속에서 익사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참기 힘들었던 저는 그곳에 햇살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만들었습니다.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숨이 쉬어졌고, 문득 심심해졌습니다. 밖에서도 놀 친구가 없는데 동굴 속마저 아무도 없다면 너무 외롭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곳에서 저의 친구를 만들었습니다.
털실로 된 장갑을 한 손에 끼고 다른 쪽 장갑을 돌돌 말아 머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중지에 머리를 끼운 뒤 검지와 약지를 번갈아 움직여 팔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만의 손가락 인형이 탄생했습니다.
저는 손가락 인형과 밖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나누었습니다. 털실로 만든 인형은 제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었고, 저는 인형에게 속에 있던 말들을 쏟아냈어요. 우리는 함께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며칠간을 동굴 속에 있던 저는 주섬주섬 인형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인형은 다시 털장갑으로 돌아왔고, 저는 조용히 동굴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 이후가 혹시 궁금하신가요?
혼자 하는 등하교였지만 마음속으로 손가락 인형과 함께 만들었던 노래를 불렀고, 함께 노는 장면을 상상하며 허공에 가지각색의 스토리를 그렸어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시간들이 겹겹이 포개지며 그토록 기다리던 새 학년을 맞이했죠. 다행히도 그 친구들과는 같은 반이 되지 않아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동굴 속에서 저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였고, 동굴 밖을 나온 순간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동굴을 좀 더 세심하게 관리하기 시작했어요.
덩그러니 창문만 만들어 두었던 공간에 테이블을 놓고 책장을 두었습니다. 하얗게 풀 먹인 빳빳한 테이블보를 깔고 자그마한 꽃병도 올려두니 제법 근사해졌어요.
LP판에서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고단한 몸을 뉘이는 시간도 갖습니다.
좋아하는 간식거리는 떨어지지 않도록 채워두었고, 눈부신 햇살이 감은 눈 위로 푹 내려앉은 날은 하늘하늘한 커튼도 달았어요.
그렇게 동굴은 점점 다채로워졌고, 이따금 들리는 주인을 반기는 듯 따사로웠습니다.
어른이 된 후로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불킥을 할 일이 많아졌어요.
대학교 3학년, 봉오리가 막 움트기 시작한 아름다운 청춘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를 가졌고 저 역시 젊음의 취기 속에 함께 어우러지곤 했습니다.
반년 정도를 짝사랑했던 후배가 있었어요. 훤칠한 키에 청자켓이 잘 어울렸던 그 후배를 남몰래 좋아하다 얼어 죽을 취기 탓에 친구들에게 말해버렸죠.
앞뒤 재지 않았던 막무가내 청춘들이 제 용기에 시동을 걸고야 말았습니다.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멈춰야 했습니다.
운동복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자리에 앉아 있던 저는 불현듯 자리를 박차고 나가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연지곤지를 찍어 바른 후 알코올 블러셔를 한 채 거울을 바라보는데 제가 제법 예뻐 보이더라고요. 그게 술기운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으니깐요.
해피엔딩은 없었습니다. 그 길로 고백을 하고 곧바로 차였으니깐요.
돌아오는 길은 기억에서 까맣게 지워졌지만, 선고백 후까임의 기억만은 강렬히 제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집에 돌아와 이불을 몇 번을 찼는지 비명을 몇 번이나 질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갔던 것은 똑똑히 기억납니다.
훤칠한 키에 청자켓이 잘 어울렸던 후배는 입이 가벼웠거든요.
순식간에 소문이 났고, 저는 마음속으로 통곡하며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동굴과 맞지 않은 샹들리에는 치워버리기로 했습니다. 샹들리에 조명 때문에 예뻐 보였던 거라고 괜한 트집을 잡아봐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죠. 동굴 속에서 가만히 자책을 곁들인 포장을 해봅니다.
그 애가 내 가치를 몰라준 거라고, 분명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토닥임을 이불 삼아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백 년 동안 영원히 깨지 않을 잠을 청했습니다.
동굴 밖을 나왔을 때는 소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주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더 멋진 남자를 만나 보란 듯이 잘 사귀면 된다는 무지몽매한 해결책을 등에 업고 당당하게 다니기로 했죠.
청춘들의 사랑은 시끄럽습니다. 제 고백은 더 강렬한 이슈로 인해 차곡차곡 덮여버렸으니깐요.
엄마가 된 저는 이제 동굴을 안방처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무르익은 세월만큼 동굴은 몇 번의 새 단장을 했고, 살림살이도 간소해졌습니다.
화려한 중세의 귀족 저택에서 북유럽풍의 인테리어를 거쳐 이제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와이키키 해변처럼 서핑하는 멋진 청년들은 없지만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고 손을 잡은 노부부가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잠깐 목줄이 풀린 충직한 개는 어느덧 강아지 시절로 돌아가 파도 위를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바다색을 닮은 하늘은 수채화처럼 물을 가득 머금은 푸른색으로 빛이 납니다.
해먹에 가만히 누워 읽던 책을 잠시 내려두고 바람을 느껴보았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널을 뛰는 아이의 감정을 받아주지 못한 채 함께 소리 지르며 옆에 있던 청소기를 바닥으로 던져 버린 날이었습니다.
청소기가 옆으로 구르며 아이의 발 위로 떨어졌고, 아이는 발을 붙잡고 서럽게도 울었습니다.
발이 아파 운 건지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엄마가 미워서 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처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울음소리는 그대로 내 심장으로 날아왔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내뱉기 힘들 만큼 제어할 수 없는 무력감이 온몸으로 퍼졌고, 허우적대는 마음은 지푸라기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푸라기가 된 동굴에서 나는 다시 마음을 비워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턱대로 동굴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동굴을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질문이 있거든요.
'해결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만 동굴 문을 열 수 있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동굴에 들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밖에서 충분히 해결책을 고민해 보고 적용해 보고 바꿔보면 되니깐요.
하지만 해결을 할 수 없는 문제라면 동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결국은 시간이 문제를 희석해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롯이 견뎌내야 하는 것이 힘든 것이지요.
견디는 동안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책입니다. 자꾸 시간을 되돌려 나를 탓하고 했던 말을 탓하고 행동을 탓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조금씩 할퀴고 갉아먹으며 억겁의 시간을 견디고 나면 나는 없어지고 말지요.
진정한 '나'는 없어지고 행복해서는 안 되는 껍데기만 덩그러니 남게 됩니다.
그래서 동굴이 필요합니다.
동굴 속에서는 온전한 나로 남아있을 수 있더라고요. 밖에서는 아주 큰 일이 있어도 동굴 속에서는 죄책감 없이 쉬고, 먹고, 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나로서 존재만 하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저 내 몸에 꽂혀 있는 압정들을 하나씩 뽑기만 하면 됩니다.
압정 한 번 밟아보셨나요? 정말 많이 아파요.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을 만큼요.
그런데 동굴 속에서 마주한 나는 수 백개의 압정을 꽂은 채 비명도 지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동굴 안에서 직접 그 압정들을 하나씩 뽑았어요. 그리고 상처 난 곳에 연고도 손수 발라주었고요.
그렇게 동굴 밖으로 나온 저는 그저 나인채로 아이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습니다. 반성을 충분히 했고, 내 상처를 자가치유한 채로 말이에요.
이따금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바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지요.
무릇 저는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어디를 가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는 편이에요.
그래서 누구든 제 곁에 다가오기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문을 개방한다는 것은 오는 사람도 환영이지만 가는 사람도 잡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그런데 그런 제가 문을 닫을 때가 있어요. 정말 소중하고 오랜 시간 동안 챙기고픈 사람이 들어왔을 때는 문을 살포시 닫습니다. 그 사람을 내 마음속 보물상자에 넣어두겠다는 나름의 사인이에요.
그렇게 힘들게 모은 보물상자인데 가끔 보물에게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보물을 지키고픈 마음이 간절하기에 저는 동굴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보물과의 시간을 더듬어 봅니다. 더듬는 손길 마디마디 따스함이 전해져 오면 그것으로 되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내 마음에 그 온기를 대어 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더라고요.
그렇게 나의 동굴은 안식처가 되어 주고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품이 되어 줍니다.
언제부턴가 나이를 먹는 것이 좋아졌습니다. 얼굴 알알이 새겨진 주름만큼 내 동굴도 안락해져가고 있거든요.
그곳에서 눈물 콧물 짜내는 시간보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간들이 더 많아졌다는 건 내가 그만큼 잘 익어가고 있다는 거니깐요.
당신에게는 동굴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그대로인 채 살고 있는 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