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상자의 사랑 노래가 아니다. 나의, 수영장 입장 BGM이다. 반짝반짝. 여기저기 호기심의 눈빛이 나를 스리슬쩍 훑고 지나간다. '뭐야! 왜 저렇게 예뻐!'의 주목이었다면. 흔쾌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나는 우리 반 수영선생님의 아내이자 강습생이다.
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의 눈이 보름달마냥 동그래진다.
"어? 남편이 자기 반 선생님이면.. 좀.. 그렇지 않아?"
네. 맞습니다. 남편이 저의 반 선생님이면 좀이 아니라 많이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절대 절대 절대 원치 않았던, 좀 많이 아닌,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사를 하면서 다니던 수영장을 옮기게 되었다.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겠지만 수영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는 운동이다 보니 초반에 적응하기가 좀 어렵다.(수영장 텃세, 기사에서 꽤 보셨죠?) 심지어 대문자 I인 나에게 이 어색함은 말해 무엇하리. 줄 제일 뒤, 소리 없이 앞사람 발가락만 보며 따라가다 조금씩 손가락도 보고, 등짝도 주물러주며, 그렇게 얼굴 보며 커피 마시기까지. 1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들이 없으면 나의 아침은 앙꼬 없는 붕어빵, 속 빈 강정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이런 나의 소중한 수영장에 침공을 했다.
그 괘씸한 사연인즉슨,
수영강사 일을 그만두고 자영업을 하던 남편으로 인해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남편이 더 이상 강습을 하지 않으니 부딪힐 일 없다며 랄라라~집 근처 수영장에 당당히 등록을 하고 신바람 나게 다녔다. (이사 전 동네에서는 남편수영장과 차로 40분 떨어진 곳에서 수영을 했다. 그만큼 같이 엮이기 싫었다!)
헌데 이 대문자 E인 남편이 문제다. 내가 뭐가 그렇게마음에 안 드는지 발차기가 안 돼서, 팔 꺾기가 안 돼서, 체력이 안 돼서 뭐가 어쩌고 저쩌고 다 안 돼서 자신이 두 수가르쳐주겠단다. 그리고는 그 핑계로 내가 다니는 수영장을 들락날락했더랬다. 당연히 예사 폼이 아닌 포스로 수영을 하는 한 남자가 눈에 띄였을 테고, 그렇지 않아도 수영 강사가 부족해 발을 동동거리는 수영 센터에서는
“뉘신지? 수업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강습 제의가 들어왔다. 남편은 사실 자영업을 하고 있지만 타고난 운동광이다. 우리 가족이 네 식구가 아니라 세 식구였다면 다른 일에 한 눈 팔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수영 강사일을 쭉 했을 양반이다. 이런 남편이 강습 제의를 물리칠 리가. 독수리가 채갈까 냉큼 하겠단다. 오후에는 본업이 있으니 오전에만 가볍게 해 보겠단다.
그것도 나의 반 수업을!!!
‘가볍긴 뭐가 가볍니. 내가 안 가벼워.’
‘그럼 난 남편을 선생님으로 불러야 하는 거니.’
‘이사까지 와서야 동네 수영장에서 신바람 나게 발 좀 차보겠다는데 왜 이러는 거야.’
'역시 당신은 내 인생의 로또'
그렇게 빌런 남편은 나의 사랑하는 수영장을 침공했다.
수영장 샤워실. 혹시 아시나요?
여기가 보통의 여느 샤워실이 아니다. 수영장 회원들은 수영장 등록과 동시에 묘한 능력을 부여받는다. 희뿌연 물안개 사이로 양치하고, 머리 감고, 몸에 비누칠하며, 수영복을 입고 벗는 것과 동시에 어제저녁 남편과 된장찌개냐 김치찌개냐로 다퉜던 이야기부터 오늘 아침 아이들이 당장 제출해야 할 숙제를 신발장 앞에서 하고 있더라는 코 막힌 이야기까지. 이 모든 것을 동시에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을 부여받는다. 이 백여 명의 초능력자들은 단 10분 안에 꼬리 없는 카더라와 희뿌연 목격담들을 생성시킨다. 그야말로 와글와글 말공작소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 반선생님 와이프가(수영장엔 우리 반만 있는 게 아니죠. 옆 반, 앞 반, 뒷 반. 적어도 수십 명) 이 수영장에 다닌단다! 지금 여기 내 옆 어딘가에서 씻고 있단다!
이보다 더 좋은 와글와글이 있겠는가.
나는 이 시끄러운 샤워실을 견뎌낼 배짱이 없었다. 카더라와 목격담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나의 조용한 인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수영장에서 남편의 수영장이 된 그곳을 조용히 도망쳐 나왔다.
하지만. 두고 온 나의 소중한 물개 친구들과 빨강 파랑 노랑 알록달록 나의 무지개 수영복들, 힘찬 발차기에 부서지는 하얀 물보라, 왜 오지 않냐며 나를 찾는 연락들. 나의 아침을 벅차게 채워주던 그것들을 잃고 나니 나의 일상은 맹숭맹숭 다 식어버린 커피맛이였다. 그게 뭐라고. 참. 이미 파란 물결의 카페인에 중독된 나는 그것들에서 완전히 도망칠 수가 없었다.
‘돌아와. 물개 친구. 어서 발차기해야지.’
멀찍이 던져둔 수영가방이 내게 말을 건다.
‘사람들은 너에게 크게 관심 없어. 너 과도한 자의식인 거 아냐?’
아. 난 과도한 자의식 따위 없는데. 그럼 이제 그만 도망가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두 달간의 셀프 유배 생활을 끝내고 나를 부르는 파란 그곳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몽글몽글하던 샤워실의 습한 공기가 나의 등장으로 살짝쿵 건조해진다. 내가 자기 반, 옆 반, 뒷 반 강사 와이프라는 걸 아는 것 같기도, 모르는 것 같기도. 나를 흘끔 거리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이것도 찰나다. 다시 여느 때처럼 여기저기서 웃음소리, 볼멘소리, 요목조목 똑똑한 소리까지 시끌시끌. 늘 그랬듯 이곳 와글와글 말공작소는 성행 중이다.
나도 질 수 없지. 일단 툭 튀어나온 배를 힘주어 쏙 말아 넣고.
“언니, 잘 지내셨어요”
더 이상의 망설임은 필요 없다. 한마디만 던지면 눈치 빠른 물개들이 사방팔방 반갑다 덥석덥석 물어줄테니.
수영장은 발 들이기는 어렵지만 한 번 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든 주식시장이다.
자, 이제 말끔히 씻었으니 물살을 가르러 가볼까.
풍덩, 물속에 몸을 던져 넣으니 앞 뒤 옆사람들이 줄지어 몰려온다.
“은선씨”
“은선아”
언니, 동생들과 반가움의 눈빛이 설킨다. 다 안다 알아의 눈망울들 다음으로따라오는 큰 웃음들.
“푸하하. 그래 나오면 되지. 이게 뭐라고. 너는 너지. 선생님이랑 무슨 상관이야.”
다들 어깨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 난리법석이다.
남편 선생님은 멀리서 귀를 쫑긋 하고 소머즈 마냥 듣고 있으면서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뚝 떼며 딴청을 부린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확신의 ‘거봐. 아무도 신경 안 쓴다고 했잖아’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만. 힘들게 물속까지 왔으니 더는 생각의 잠수를 하지 않겠다.
“자유형 5바퀴로 시작하겠습니다”
남편이 아닌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촤악. 몇 달만에 물을 속시원히 갈라본다. 그래 이 느낌이지. 아침은 이렇게 힘차게 발 차고 팔 돌리며 시작하는 거지. 물 밖으로 거친숨을 토해내며 그동안 먹었던 고구마도 함께 토해내 버렸다.
@남편이 수영 선생님이면 좋은 점@
1. 대화가 많아진다
늘 아이들 이야기로만 채워졌던 부부의 일률적인 대화가 나의 취미와 그의 직장 생활이 만나며 수영이야기, 수영회원들 이야기, 수영회원들이 해주었던 이야기로 나의 수영복 색깔만큼이나 다채로워지고 숨이 넘친다.(1번 총각과 끝 번 아가씨가 몰래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과 큭큭 댈 수 있다니!)
2. 지리멸렬한 긴 싸움이 없어진다
험악한 대화 후 다음 날 아침. 나는 까만 수경 사이로 날 선 눈빛을 남편에게 쏜다. 남편 선생님은 모르는 척 괜히 나를 쓱 밀어주고 쭉 당겨주고 어라 던져주기까지 한다. 흥칫뿡. 이러면 마음 약한 아내는 레이저를 쏠 수 없지 않는가.
3. 수영장 회식을 이해한다
보수적 성향인 남편은 어떤 회식이건 늘 남편 중 1등으로 “언제 와?” 전화를 날려 회식의 흥을 깬다. 하지만 수영장 회식은 다르다. 늦은 시간까지 어깨춤을 들썩이고 있음에도 전화를 하지 않는다. (꽤나 괜찮은 남편인 척 이미지 관리를 하니 난 그 덕을 좀 봐야겠다)
3. 나의 수영복 구매에 관대하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빛깔을 다 채우고 말리라’ 욕망 은선씨를 이해한다.
4. 딴짓은 생각조차 못한다
와이프만 수영장에 있는가. 와이프의 친구, 언니, 동생, 오빠들이 촘촘한 그물을 펼치고 있어 눈동자도 못 돌린다.(아무 탐내하지 않는것이 문제이긴 합니다만. 쩝)
@남편이 나의 수영선생님이면 불편한 점@
1. 설레임권리를 강제 박탈 당한다
선재가 선생님일 줄 알았건만 아침에 봤던 그 아저씨가 또 저기 있네. 하. 나의 볼 권리는 대체 어디에?
(같은 반 회원님들께도 심심한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2. 다이어트는 필수다
진짜, 정말로, 참말로 나를 안 볼까? 내 부른 배를 진심으로 안 본다고?(그것이 알고 싶다)
3. 원치 않는 연기력이 상승된다
물속에서 남편 선생님에게 괜히 레이저 눈빛을 쏘았다가는 눈치가 치타급인 회원들에게 지난밤 우리 부부의 험악한 대화를 들킬지도 모른다. 수영장에서 보여주는 세상 둘도 없이 너그러운 내 모습이 이중인격으로 보이지 않으려면, 완벽한 연기가 필요하다.
4. 남편이 수영 선생님이어도 아내는 인어공주가 될 수 없다
수영을 못해서 이런저런 고민을 늘어놓으면 10명 중에 9명의 대답이 “뭐가 걱정이야. 남편이 선생님인데”이다. (아니 그러는 본인은 수학선생님이시면서 왜 자녀분 수학 걱정을 하시나요) 남편이 수영 선생님이어도 몸은 내 몸인지라 시키는 대로 따라가 주지 않는다. 심지어 운전과 비슷한것이 더 가르쳐주려 했다가는 이혼 서류가 날아갈지도 모르니, 수영강사님들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