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은 잘 논다. 어떻게 저렇게 놀 수 있나 싶을 만큼 혼자서도 잘 놀고, 친구들이랑은 더 잘 논다. 학교가 끝나고 이어지는 학원 스케줄을 마치고 나면 4시 무렵.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엄마, 놀다가 들어갈께."
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긴다.이 지긋지긋한 짝사랑.
매일 6시가 넘는 시간까지 축구하고 놀이터에서 뛰어 놀다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집에 들어온 녀석의 첫 마디.
"아.. 더 놀고 싶었는데..."
잉? 나오는건 한숨 뿐.
잔소리는 속으로 삼킨다.
'어휴, 뭐가 되려고 저렇게 놀기만 하는거야. 그 시간에 책이나 좀 읽지.'
그런데 신나게 놀고도더 놀지 못해 아쉬워하는 아들을 볼 때면또 한편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뿌듯함이 있다.
"세상 사람들, 이리 좀 와 보세요. 이렇게 잘 노는 아들이 제 아들이랍니다."
마이크를 붙들고 자랑하고 싶다. 이건 정말이지 아들이 수학 심화 문제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스스로 다 풀었을 때와 같은 결의 뿌듯함이다.
물론아들은 혼자서도 잘 논다. 아침형 인간인 아들은 주말에도 어김없이 7시쯤 일어나 혼자 거실에서 레고조립도 하고 만화책도 보고 그림도 그리며 우리를 깨우지 않고 혼자의 시간을 알차게 즐긴다.
"엄마 심심해."
이 말은 우리 아들 입에서 "엄마, 공부가 정말 재밌어!"보다 나오기 힘든 말이다.
나는 이렇게 잘 노는 내 아들이 정말이지 부럽다.
나는 잘 놀 줄 모른다. 아니 놀 줄을 모른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제대로 못 놀아 본 나는 단지 '노는 것'에 시간과 돈을 쓰는 게 아까워감히 놀지 못한다.
육아에 지치고 직장일에 지친 어느 날에는 놀아볼 결심을 단단히 하고 남편에게 선언한다.
"오늘은 진짜 제대로 놀아볼테야! 나 찾지마."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오지만 고작 나의 놀이는 카페에 앉아 책 읽기, 서점에서의 책 쇼핑으로 끝내고 저녁이 되기 전 집으로 돌아온다. 이 지긋지긋한 귀소본능.
얼마 전 배우 한가인님의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 탁 꽂히는 그녀의 한마디.
"저는요, 얼마나 답답하냐면 새장 속의 새 같이 살아요. 새장이 없으면 스스로 새장을 만드는 스타일이에요."
앗 이건 내 얘기인데.
닮은거라곤 1도 없는 한가인님과 나는 속이 꼭 닮았구나.이왕이면 겉모습도 좀 비슷하지. 하다못해 콧잔등의 매력점이라도.
나 역시 내가 만든 나의 울타리 속에서만 살아간다. 내가 만든 울타리는 엄마, 아내, 선생님이라는 나의 역할로 세워진 울타리이다. 그 역할을 벗어나는 시간과 행동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울타리 밖으로 발을 한 발짝이라도 디디면 나는 나를 억지로 다시 울타리 안으로 집어 넣는다.
"정신차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그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 여행이다. 나는 여행가서 남들처럼스케줄을 짜서 관광을 하거나 맛집을 가거나 하지 않는다. 숙소 부근 적당히 걸어다닐 수 있는 식당과 카페, 아이들과 뛰어놀고 산책할 정도의 장소만찾아두고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울타리가 없기에 내 마음대로 놀 수 있다.
세 끼 밥도 안 해도 되고, 과자를 마음껏 먹어도 되고, 아이들 숙제도 안봐줘도 되고, 책도 안 읽어줘도 되고, 하루종일 넷플릭스를 봐도 된다. 매일 맥주와 와인을마시다가잠들곤 한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다시 나는 스스로 울타리 속에 들어간다.
이토록 완벽한 스위치라니.
이 스위치마저 없었더라면 내 삶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마냥 생기없이 꽃도 못 피운채 울타리안에 쳐박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말인 오늘도 아들은 10시에 친구들과 풋살장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손흥민 풀착장을 하고선 축구공과 함께 사라졌다.너무 완벽한 가을 날씨덕분에 오랜만에 놀아 볼 결심을 하고 점심 먹으러 들어온 아들에게 한 마디 건넨다.
"오늘은 완전 가을이네. 집에만 있기에는 아까운 날씨니까 밥먹고 공원 산책 가자"
"나 집에만 있을거 아닌데.이따가 애들이랑 포켓몬카드 챙겨서 다시 모이기로 했어. 난 나가서 놀테니까 아빠랑 갔다와."
아들아. 넌 노는거엔 완벽한 계획이 있구나. 멋지다. 아들아.
이젠 내 품을 벗어나 친구들과 노는게 더 재밌는 아이에게 서운한 마음이 없진 않아서 공원에 가는 척하며 뒤따라 나섰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붉은빛 나무들로 둘러싸인 풋살장. 그 안에서 맑디 맑은 얼굴로 친구들과 뛰어노는 아들.그것이야말로 내겐 완벽한 가을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