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가 다시 그 길을 걷게 된다면
결혼을 하고 처음 둥지를 튼 곳은 인왕산 자락의 작은 관사였다.
남편은 ROTC출신 군인이었고, 나는 낯선 도시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자연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면서 지냈다.
인왕산은 늘 우리 집 창문 너머에 조용히 서 있었다. 우람하고도 든든한 모습으로, 마치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내가 기억하는 집은 안국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독립문역에서 내린다.
그런 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직장은 송파였는데 내가 사는 집은 인왕산 근처였다.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여정이 신날 때도 있었지만 지옥철로 변신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숨 쉬는 게 힘들어진다. 술냄새와 반찬냄새 다양한 냄새가 즐비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엔 인왕산과 위에서 내려다볼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서울 시내인 종로가 다 보였다.
휴일이면 남편과 함께 인왕산 성곽길을 걸었다. 그 길은 우리가 자주 싸우던 길이기도 하고, 서로의 고단함을 꺼내놓던 소중한 길이기도 했다. 때로는 말없이 걸었고, 때로는 눈물이 앞을 가려 산 너머 하늘을 보지 못한 날도 있었다.
안국역 근처까지 나들이를 가면, 북촌의 한옥 골목이 그저 고즈넉하다고만 느껴졌던 시절이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조용한 골목길이 내 젊은 날의 혼란과 불안을 천천히 가라앉혀주는 힘이 있었다는 것을.
인왕산은 풍수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고, 지금은 등산로와 도심 속 자연휴식처로 인기가 많다.
서촌부락은 인왕산 아리 한옥이 밀집된 고즈넉한 마을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통인시장, 청운문학도서관 등이 있으며, 예술가와 작가들이 많이 거주한 곳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한옥길과 고풍스러운 카페, 미술관 등이 있어서 관광객들도 보였다.
안국역 근처엔 운현궁, 정독도서관, 성균관 등 역사적 건물도 많아 산책만 해도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예전보다 상업화가 조금씩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조용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이다.
지역 특성상 고즈넉한 분위기가 많은 종로는 옛날 한국식 지붕과 그리운 집들이 많이 있었다. 도서관도 가깝고, 마트도 있고, 조금만 나가면 인사동도 갈 수 있고 시청, 삼청동까지 갈 수 있어서 난 그곳에 살 때 모든 인프라를 누리면서 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지금 생각해도 꿈같은 시간이었다.
지금은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는 동네가 되어버렸다.
서울에 사는 동안 너무 많은 이사를 해서 지금 집값이 어디가 올랐다는 그런 소리를 듣거나 가끔 서울에 올라가서 우리가 살았던 동네를 가보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개발이 되어있어서 아쉬운 마음에 탄성이 나올 때도 있다.
만약 남편이 지금도 군대에 있었어도 그 집엔 계속 살 순 없었을 것이다.
군인들은 지역을 옮겨 다니는 특성 때문에.. 난 아이를 낳고 학교 때문에 서울지역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남편은 ROTC 중대장까지만 하고 제대를 하였다. 많은 고통과 겪지 않아야 할 일들을 겪고 난지라 난 그만두지 말라는 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 관사를 몇 년 살지 못하고 떠났었다.
난 무척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내가 살던 동네 중에서 이 동네가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아마도 자연과 도심의 조화가이루어 진 데다 현대식 건물이 공존해 있는 것 때문에 기억에 더 많이 남는 듯하다.
시간이 흐르고, 도시는 변했지만, 인왕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언제가 다시 그 길을 걷게 된다면, 나는 조용히 말할 것이다.
"여기서 나, 엄마가 되었어요."
그리고, 어른이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