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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과 소세키, 그리고 문학에 대하여.

한 시대를 살아온 두 작가 이야기

by 디오게네스

근현대 중국 문학사에서 거장을 뽑으라면 단연 루쉰이다. 그의 저작 "아Q정전"이나 "광인일기"는 오늘날에도 중국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데다 문체 역시 간결하고 깔끔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본에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다면 바로 나쓰메 소세키다. "도련님"이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작가인 소세키의 위상은 일본 1000엔 지폐에 실릴 정도로 높다.

eoeog.png 소세키와 루쉰. 콧수염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일단 두 사람의 외모를 보면 거의 쌍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닮아 있다. 루쉰이 양복을 입은 사진은 찾기 어려우나, 복장과 머리 스타일 정도를 제외한다면 두 사람은 닮았다. 아, 문학을 하려면 이렇게 생겨야 할까. 길게 기른 콧수염과 짧은 머리 스타일은 20세기를 살아온 작가들의 표상인가 싶다.


두 사람의 일생 역시 판박이다. 일본 명문가에서 태어난 소세키는 이내 가세가 기울어 다른 집안에 두 번이나 양자로 보내졌다. 이후 어머니와 형제가 세상을 떠나는 등, 작가로 성공하기 전까지 비극적인 삶이 이어졌다. 몰락한 지배층 출신인 데다가 가족과의 이별을 겪었는데, 아내 역시 자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


루쉰는 어떠하였을까? 그 또한 명문가 집안으로 어렸을 적에는 유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 또한 가세가 기울어 떠돌게 되는데, 그 심정은 소설 '고향'에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 작가가 된 이후로도 국민정부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마냥 순탄하지많은 않았던 것이다. 이토록 비참한 삶이 그들을 무문학의 현장으로 이끈 것 같다.


어쩌면 뛰어난 문학 작품은 혼란한 세기에서 빛을 발하는 걸 지도 모르겠다. 소세키가 살던 시대의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구시대의 가치관과 서양의 문물이 혼란하게 뒤섞였던 시기였고, 중국 역시 신해혁명과 이어진 군벌 세력의 득세 등으로 쪼개져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한 세상을 비판적, 성찰적으로 바라보았던 이들의 시각이 뛰어난 문학적 성취로 이어지게 되었다.


희망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은데, 길이란 것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가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는 자신의 작품 "고향"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루쉰의 말처럼 희망이란 불확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길을 만들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르다 보면 결국 희망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돌을 깨는 물방울처럼, 나무로 자라는 새싹처럼 말이다.


이 두 작가를 보니, 어쩌면 힘겨운 시대야말로 문학과 시의 원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한강 작가님의 소설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는 격정적이었던 옛 시대의 고뇌를 잘 녹여낸 덕분이 아니었을지.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하늘을 보며 노래한 윤동주의 시가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이해가 간다. 사실 교과서에 실린 시와 문학을 보아도 현대의 작품보다는 근현대, 혹은 그 이전의 작품이 많은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소설과 문학의 근본적인 전개와 이어진다고 본다. 소위 '재미있다' 혹은 '인상이 깊다'라는 소설들은 전개, 발단, 절정, 결말의 서사 구조를 잘 갖춘 경우가 많다. 평탄하거나 안정적인 이야기는 독자들이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는 것. 가령 주인공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다 끝났다면 그저 그런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20세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전쟁과 대공황, 그리고 매우 빠른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졌던 시대니까. 힘들게 살았으나 그만큼 기회와 가능성도 많았던 시대로 보인다. 소위 소설 같은 전개가 사방에서 일어나는 그런 시대는 아니었을지. 격동하는 시대에 맞추어 하나의 소설처럼 살다 간 인물들의 이야기는 분명 작가들에게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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