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골목은 평소보다 낮은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각이라서인지, 대기의 색채는 엷은 청색과 금빛이 맞닿은 경계에서 조용히 교차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문 시간대라 골목의 공기층은 얇은 막처럼 느껴졌고, 그 안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결이 작은 파동을 만들며 스스로 무너졌다 일어나는 장면을 반복하는 듯 보였다. 응고된 생각이 액화와 기화를 번갈아 거치며 조금씩 형태를 바꾸는 것 같은 질감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오래된 은행나무 그림자가 바닥에서 길게 늘어지며 형태를 천천히 바꿨다. 그 그림자의 끝자락에서 잎 하나가 가벼운 떨림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람에 휩쓸려 떨어지는 기세와는 전혀 다른 성질이었다. 오래 머물렀던 자리에서 부드럽게 이탈하는 움직임, 연결고리를 스스로 인정한 뒤 흘러나오는 듯한 기류에 가까웠다. 잎 끝은 일정한 선을 그리기보다 순간마다 각도를 달리했고, 그 변화는 아주 작은 무게 조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잎이 이동하는 찰나의 순간, 주변의 소리는 한 겹 접히는 듯 낮아졌다.
그 잎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예전의 장면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등을 돌리던 누군가의 얼굴, 마지막 말이 사라지던 순간 문틈 사이에서 바뀌던 공기, 멀어지는 발걸음 뒤에서 길게 남던 희미한 자취까지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 시절의 나는 이런 장면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움직임의 속도를 이해하지 못했고, 말이 멈춘 자리에서 번져 나오던 미묘한 신호도 보지 못했다. 명확한 단어만이 관계를 설명한다고 믿었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서야, 그 침묵과 흔들림이 전하고자 했던 뜻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말이 없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많은 설명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
잎의 이동을 바라보는 동안 떠오른 장면들은 하나둘 더 명확해졌다. 감정은 크게 흔들릴 때 시작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이런 작은 비틀림에서 이미 많은 변화가 예고되고 있었다. 관계의 흐름 역시 그렇다. 메시지를 적었다가 지우던 날들, 대화 중 짧게 멈춘 시간이 필요 이상 길게 느껴지던 시기, 통화 버튼 위에 올린 손끝이 끝내 내려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머물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멈춤이야말로 흐름의 방향을 조정하는 가장 또렷한 신호였는데, 그때의 나는 그 의미를 보지 못했다.
불안한 시절의 나는 그 간극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라지는 틈을 메우려 더 많은 말을 쏟아냈고, 문장이 많아질수록 중심은 오히려 흐릿해졌다. 결국 전하려 했던 마음은 소음 속에서 형태를 잃고 말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멈춰 있는 순간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사실을 천천히 이해했다. 억지로 붙들지 않은 잎이 자기 무게에 맞추어 흘러내리듯, 마음도 얽어매려 하지 않을 때 물결처럼 자리를 찾아갔다. 놓아주는 움직임이 가장 확실한 존재의 증명이 되는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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