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들
손톱이 연한 살을 파고들어, 핏기가 하얗게 도망칠 때까지 주먹을 쥐어본 적이 있는가.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그 극한의 긴장 속에서, 당신의 손안에 잡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그 좁고 독한 틈새로는 바람 한 줄기, 빛 한 줌조차 스며들지 못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손바닥 깊이 파인 붉은 반달 자국과 욱신거리는 둔탁한 통증뿐이다.
반대로 손바닥을 탁, 하고 펼쳐 보라. 팽팽했던 근육이 풀리는 순간, 비로소 서늘한 공기가 손가락 사이를 유유히 흐르고 바람이 머물다 간다.
우리는 평생 이토록 선명한 육체의 이치를 거스르며 살았다. 으스러지도록 움켜쥐어야만 내 것이 된다고 믿었다. 잡히지 않는 사람의 마음도, 아득한 성공도, 손끝에 힘을 줄수록 내 곁에 오래 머물 거라 착각했다. 그래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렸고,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하지만 죽도록 애쓸수록 삶은 젖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틈으로 무심하게 빠져나갔다.
지금 가슴 한복판이 텅 빈 동굴처럼 공허하다면, 그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세게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비밀은 더 많이 움켜쥐는 데 있지 않다. 뻣뻣하게 굳은 손아귀의 힘을 툭, 하고 풀어버리는 그 짧은 찰나에 있다.
“손을 비울 때, 마음은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다.”
손을 꽉 쥔 긴장은 필연적으로 마음의 체기로 이어진다. 기름기 도는 대화가 오가는 불편한 식사 자리였다. 접시 위 요리는 차갑게 식어 비린내를 풍기고, 겉도는 말들은 허공에서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그때 누군가 ‘솔직함’이라는 얇은 포장지를 씌운 무례한 한마디를 툭 던져 공기를 갈랐다.
명치끝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송곳에 찔린 듯 조여 왔지만, 나는 습관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분위기를 깨면 안 돼.’ 그 낡고 녹슨 배려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꿀꺽.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찬물과 함께 불쾌한 덩어리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속이 더부룩하게 막힌 듯 답답해 가슴을 여러 번 두드려야 했다. 이제는 안다. 그때의 그 반응은 배려가 아니었다. 갈등의 파열음이 두려워 뒷걸음질 친 비겁한 회피였다.
참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억지로 삼킨 감정은 위액으로도 녹지 않은 채 마음 한구석에 딱딱하게 굳어, 결국 독이 되어 혈관을 타고 흐른다. “나는 괜찮아”라고 창백하게 웃어넘긴 순간들은, 며칠 뒤 무기력증이라는 무거운 청구서를 기어이 들이밀고 만다.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무게로 남을 뿐이다.”
[내면의 방패] 무례함 앞에서는 억지로 웃지 않는다. 대신 3초간의 무거운 정적을 그 사람 앞에 내려놓는다. 그 짧은 멈춤은 나를 지키는 가장 품위 있는 방패가 된다.
속을 게워내지 못한 사람은 겉모습에 집착하게 된다. 마치 결투를 앞둔 검투사처럼 긴장된 아침이었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며 문득 생각했다. ‘이 매끄러운 끈이 오늘 하루 나를 이끌어줄까, 아니면 내 목을 옥죄어 올까.’ 풀 먹인 셔츠는 갑옷처럼 뻣뻣했고, 거울 속 표정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발표는 성공적이었고 박수 소리는 요란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넥타이를 푸는 순간, 가슴 한구석으로 시린 바람이 휑하니 불어왔다. 거울을 다시 봤다. 그곳엔 ‘나’는 없었다. 타인의 욕망에 맞춰 조립된, 전혀 모르는 낯선 타인이 충혈된 눈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타인의 시선에 맞춰 재단된 삶은 화려할지 모르나, 내가 살갗으로 감각하는 삶의 온도는 시리도록 차갑다. 이제 시선을 창밖에서 내면의 방으로 돌려야 한다. 보여주기 위한 치밀한 ‘연출’을 멈추고, 거칠게 살아 숨 쉬는 ‘나’를 마주해야 한다. 진짜 자존감은 거울 앞에서 억지로 미소 지을 때가 아니라,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지친 눈동자를 보고도 편안함을 느낄 때 자라난다.
“가장 편안한 순간의 표정이, 내가 오래 지켜야 할 진짜 얼굴이다.”
[응시의 시간] 오늘 우연히 거울을 마주한다면 옷매무새를 고치지 않는다. 대신 거울 속 깊은 눈동자를 5초간 가만히 응시한다. “오늘 좀 피곤해 보이네. 그래도 괜찮아.”
나를 잃어버린 자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길을 잃는다. 모든 소음이 잠든 새벽 2시, 방 안에는 창백한 휴대폰 불빛만 유령처럼 떠다닌다. 손가락은 습관처럼 연락처 목록을 오르내리다 특정 이름 앞에서 멈췄다. 이미 맥박이 멈춘 인연임을, 더는 기쁨을 주지 않는 관계임을 알면서도 ‘삭제’ 버튼 위에서 손가락은 길을 잃고 배회한다.
이별은 떠나는 사람의 몫이 아니었다. 홀로 남겨진 사람이 마쳐야 할 끈질기고 고독한 숙제였다.
“관계를 떠나는 용기보다, 끝난 관계를 붙들지 않는 용기가 더 필요하다.”
관계가 종료되었다는 사실보다, 그 빈자리가 주는 한기를 견디지 못하는 내 마음이 더 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흐르지 않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이미 생명을 다한 관계를 붙들고 있는 건, 나 자신을 향한 가혹한 형벌이다. 멈춰버린 인연을 품고 있으면, 내 마음의 시간도 그 자리에서 함께 멈춘다.
‘삭제하시겠습니까?’ 건조한 물음 앞에 숨을 고른다. 째깍, 째깍. 벽시계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크게 들려온다. 나는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버튼을 눌렀다. 빈손이 되어야만, 다가올 새로운 계절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낯설 것이다. 손에 쥔 낡은 끈을 놓는 순간,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한 한기가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외로움이라는 추위가 아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창문을 열었을 때 불어오는, 저 신선하고 비릿한 새벽바람의 감촉이다.
“내려놓음은 상실이 아니라 회복의 첫 숨이다.”
관계를 정리하고 나면, 비로소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고개를 든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나만 홀로 깨어 어둠이 내려앉은 천장을 응시한다. 내일 있을 계약, 말라가는 자금, 아이의 불투명한 진로…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날카로운 톱니바퀴가 되어 머릿속을 헤집는다. 과열된 엔진처럼 뇌는 멈출 줄을 모르고 윙윙거린다.
“탁.” 그때 창밖에서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짧고 명료한 파열음이 엉킨 생각의 실타래를 툭 끊어주었다. 몽테뉴는 말했다. “사람은 일어난 일보다,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 때문에 더 고통받는다.”
내가 앓고 있는 걱정의 9할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그림자였다. 실체 없는 유령과 싸우느라, 입안이 바짝 마르는 줄도 모르고 창밖의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를 놓치고 있었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계속 붙잡고 있는 생각이다.”
진짜 평온은 완벽한 준비에서 오지 않는다. 어떤 거친 파도가 닥쳐도 ‘나는 헤엄칠 수 있다’는 내 팔다리에 대한 믿음에서 온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으로 이길 수 없다. 마음이 소란스러울 땐, 차라리 몸을 움직여 그 소음을 덮어야 한다. 의지보다 강한 것은 행동의 감각이다.
“불안은 상상이 키우고, 행동은 그것을 무력하게 만든다.”
[감각의 회복]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는다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차가운 물 한 잔을 식도로 흘려보내고 창문을 연다. 머릿속의 열기를 식히는 그 차가운 ‘감각’만이 불안을 잠재운다.
밤새 열기를 식힌 다음 날 오후, 큰맘 먹고 옷장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살이 빠지면 입겠다던 청바지, 유행 지난 재킷, 먼지 쌓인 기념품들. 하나둘 꺼내 상자에 담는다. 옷가지들 사이에서 묵은 먼지 냄새가 훅 끼쳐온다. 추억은 낡은 물건에 깃드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남는 것이니까.
덜어낸다는 건 무작정 버리는 게 아니다. 무엇이 내게 진짜 소중한지 가려내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다. 물론 처음엔 낯선 빈자리가 두려웠다. 휑한 공간이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알게 되었다. 그 빈터는 공허가 아니라 여유였다. 물건에 가려져 있던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들어왔고, 내 숨소리가 한결 편안해졌다. 그릇이 비어야 새 음식을 담듯, 마음도 비워야 평화가 깃든다.
“비워낸 자리가 공허한 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 들어설 자리다.”
이제 다시 손을 내려다본다. 꽉 쥔 주먹 대신, 힘을 뺀 손바닥을 가만히 펴 본다. 비어 있어서 쓸쓸한가. 잠시만 그대로, 그 빈손을 바라본다.
따스한 햇살은 결코 힘주어 쥔 주먹의 등 위로 내려앉지 않는다. 오직 무방비하게 열린 손바닥, 그 부드러운 살결의 오목한 틈으로만 빛은 고인다.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햇살은 언제나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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