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한쪽에서 작은 외장 장치가 얇은 회전음을 내며 돌아가던 날이 있었다. 케이스를 손끝으로 가볍게 쓸자 얇은 가루가 묻어 나왔다. 어느 계절에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사진들, 저장된 이름을 잃은 파일들, 아직 흐릿하게 남아 있는 표정들이 이곳에 있었다. 지워진 줄 알았던 기록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마음 한쪽에서 오래 잊고 지냈던 나 자신을 불러오는 듯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지나간 장면은 사라져도, 거기에 닿았던 나의 시선과 마음가짐은 형태를 바꿔 남아 있다는 사실을. 한 장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이던 태도, 손을 멈추고 숨을 고르던 순간의 감각, 누군가에게 건넸던 한마디가 지금의 나를 이루는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 흔적들은 억지로 붙들지 않아도 조용히 머물며 방향을 잡아주곤 했다.
이 여정은 그런 남은 자국을 따라간다. 오래된 기록 속에서 드러난 나의 변화, 예상치 못한 영역에서 밝혀진 마음의 움직임, 놓아두는 태도에서 얻은 여유를 차근히 살펴본다. 읽는 동안 독자 여러분에게도 자신만의 흔적이 문득 떠오르기를 바란다. 언젠가 무심히 지나친 순간이 지금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은 생각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그 발견이 이 사유를 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감각은 외장 장치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닌,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오래된 저장소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기억이라는 갈무리터는 세월에 눌린 발자취가 창틀 위에 얇은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표면을 일부러 닦지 않아도 그 아래에는 여전히 밝게 유지되는 무엇인가가 있다. 예전에 그 기록을 남기던 나 자신이 느꼈던 감정의 조각이다. 사람은 지나간 시간 속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보다, 그때 마음을 기울였던 순간의 느낌을 더 오래 간직한다. 그 마음의 잔상은 안쪽에서 형태를 유지하며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밑바닥이 된다.
얼마 전, 오래된 일기장을 우연히 펼쳐 보았다. 그 안에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다소 거칠게 표현된 화와 밀어붙이려는 힘이 적혀 있었다. 그 글을 쓰던 당시의 ‘나’라는 한 사람은 이제는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 감정은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한다. 예전의 나는 지금 이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한 채, 따로 떨어진 삶의 한 조각으로 남아 있다. 나와는 다른 한 사람이 자기만의 경계를 지키며 그 시절의 표정을 유지하는 모습에 가깝다. 책상 위에 놓인 낡은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그때의 손길이 닿았을 법한 구간을 따라가 본다. 펜대를 감싸던 힘의 방향을 짐작해 보고, 그 손이 멈춰 섰을 때의 호흡을 떠올린다. 이러한 경험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말하는 것처럼, 과거의 '나'라는 존재가 현재의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오는 방식으로 시간 속에 보존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렇게 조금 떨어진 영역에서 나를 바라볼 때, 살아온 모든 시간이 한 곳에 모여 작게 숨 쉬는 저장소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서 지금의 나는 사라져 가는 나를 기록하는 관찰자로 일한다.
예전에 드러났던 얼굴은 어느 순간 흩어져 소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실제가 지금의 생각 아래 남겨 둔 뒤쪽 바람 같은 느낌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 바람의 테두리와 깊이를 하나씩 짚어 보며, 지금 내가 어떤 무게로 서 있는지 확인한다. 그렇게 남겨진 자국을 다시 더듬는 일이, 나를 알아가는 가장 조용한 작업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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