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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나누는 대화

by 정성균


느린 산책의 흐름


아침이 주는 감각, 뺨에 와닿는 공기의 선명함이 일품이었다.


이 숲길은 아직 이른 햇살을 머금지 못했으니, 축축한 흙내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그 길을 걷는다.


땅을 딛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희미하게 이어지는 시간, 세상의 모든 잡음을 걷어낸 듯 그 발자국 소리는 고요한 리듬을 자아냈다. 발 앞의 낙엽이 눌릴 때 작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 리듬에 맞추어 걷는 속도는 자연스레 느려지는 것이다.


흙과 마른 낙엽을 밟는 소리는 작은 북소리와 같았고, 그것이 우리가 공유하는 관계의 고요한 배경 음악이었다. 때로 그가 나보다 반 걸음 앞서 걷는가 하면, 어느 순간 내가 그의 뒤를 따르기도 했다. 걸음의 차이는 길지 않은 구간에서 이내 사라졌고, 다시 하나의 느린 호흡으로 수렴한다. 구태여 서로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애쓰지 않았던 우리다. 그저 이 길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언어를 대신했다. 이 느린 산책은 내가 경험한 대화 형식 중 가장 정직한 것이리라.


그는 걷는 동안 간혹 어깨를 한 번 들썩이거나, 코트 주머니의 손을 꺼내 허공에 짧게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어떤 문장을 완성하려던 시도라기보다는, 지금 느끼는 편안함이 바깥으로 잠시 새어 나온 표식으로 그것은 읽혔다.


나 또한 입을 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에 떠올랐던 수많은 생각 조각들이 언어로 변환되어 상대에게 전달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신 그의 발걸음이 내 것보다 조금 더 깊은 힘이 실렸음을 감지했다.

그 아주 약한 힘의 변화만으로 그의 밤이 평온했는지, 혹은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산책길의 흐름은 말 한마디 없이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고 조절하는 섬세한 저울의 역할을 해준다. 두 쌍의 발자국 소리가 하나의 흐름으로 엮이는 그 찰나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나누는 가장 깊은 형태의 대화였다. 말 없는 이 동행은 상대로 하여금 홀로 서 있더라도 결코 외롭지 않은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일과 다름없었다. 이 고요한 동반이 관계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로 작용했다.


말 없는 교류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기로 약속하지는 않았다. 그런 우리는 오랜 시간을 통해 목소리가 아닌 다른 경로로 교신하는 법을 익혀버렸다.


대화가 시작될 때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그 문장이 놓인 정서적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는 안내자였다. 이를테면, 그의 시선이 내 눈동자에 머무는 시간이 평소보다 길어질수록, 그가 전하려는 내용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내면의 감정 영역에 닿아있음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길 건너편의 간판이나 저 멀리 나무의 끝으로 옮긴다면, 그것은 그가 지금 전하는 내용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그 내용을 명료하게 정리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무언의 합의로 보였다. 상대의 표정 하나만으로도 그날 하루의 정서적 흐름이 결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표정이야말로 가장 빠르게 도착하는 전령이 아니겠는가. 입술의 아주 작은 떨림이나 눈썹 끝의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우리는 수많은 문장을 건너뛸 수 있었다. 어떤 관계의 결정적 순간은, 오고 가는 말의 총량이 아니라 그 짧은 순간에 서로가 건네는 눈빛의 깊이에 의해 좌우되곤 했다.


한 번은 내가 물을 마시려 컵을 들었는데, 스쳐 지나가던 그가 건넨 손동작이 기억에 남는다. 컵에 물이 충분한지 확인하려던 아주 사소한 제스처였지만, 나는 그 행위를 통해 내가 그의 시야 안에 온전히 들어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긴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를 뜰 때도, 그는 내 자리 옆에 조용히 머물러 주곤 했다. 그 침묵은 나에게 말을 하라는 압박 대신, 오직 '당신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는 명확한 확인이었다. 언어는 때로 실수를 만들거나 오해를 부르지만, 마음을 담은 표정이나 행동은 그 자체로 진실의 영역에 속했다. 말 없는 교류 속에서 관계는 매번 자신의 방향을 조용히 정립해 나간다.


나이 듦과 대화 방식의 변화


스물셋 일 때의 나는 늘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야만 속이 시원했다. 그때의 대화란 상대방의 문장에 내 문장을 덧붙이거나, 혹은 그의 논리를 기어이 꺾고 내가 설정한 결론에 도달해야만 끝이 나는 일종의 시합이었다. 내 말의 강도와 속도를 높이는 것이 관계에서의 영향력이라 믿었을 뿐이다. 상대가 말을 하는 중에도 머릿속에서는 반박할 문장의 구조를 짜기 바빴던 시간이었다. 그 시절 나는 타인의 말소리를 듣고 있었을 뿐, 그의 마음이 전하려는 맥락에는 전혀 접속하고 있지 못했다. 젊음이 가진 직설적인 에너지는 때로 관계를 빠르게 소모시키는 폭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한때 나는 사춘기를 지난 아이와 함께 걷는 길에서 말이 줄었을 때, 그 낯섦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이의 침묵을 두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낼지, 혹은 기다릴지 망설이던 그 순간, 비로소 나는 듣는 태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허나 중년 이후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대화라는 행위가 결코 승패를 가르는 경기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제 말을 듣는 동안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대신, 등받이에 기대앉아 상대의 말을 조용히 지켜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기보다, "지금 이 사람이 어떤 하루를 건너왔는지"를 짐작하려는 태도로 바뀐 것이다.


표정의 힘 빠짐, 말속에 섞여 있는 한숨, 대답 사이의 간격 같은 것들을 먼저 바라보게 되었다. 이는 겉으로만 예의를 갖췄다기보다, 상대의 마음 상태를 추론하고 이해하려는 '관점 취하기(Perspective-taking)'의 노력이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그의 문장을 듣는 연습이 시작된 것이다.


관찰하는 태도, 즉 상대가 문장을 만드는 과정을 끝까지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말을 아끼게 되면서, 내가 할 말보다 상대가 하려 했던 말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상대의 말속에 담긴 불안, 망설임, 기대 같은 감정의 여백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귀로 듣는 것은 소리에 불과했지만, 관찰을 통해 듣는 것은 삶의 깊은 서사로 다가왔다.


듣는 사람의 자리


상대의 말이 길어지든, 잠시 멈추든, 나는 그 흐름에 개입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습관을 들였다. 말을 끊지 않고 그저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자세는 듣는 사람이 상대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깊은 안정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조언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사람을 찾는다.


그 과정을 온전히 지켜봐 주는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정돈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행위였다. 상대는 더듬거리는 문장을 내뱉다가도, 내가 내어준 넉넉한 여백 속에서 갑자기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선명하게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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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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