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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문 뒤에서 비로소 켜지는 저녁의 시간

흔들리는 중년을 지탱하는, 책상 위 가장 사적인 공부

by 정성균

닫힌 문 뒤, 비로소 켜지는 시간


짧은 전자음이 허공을 가른다. 굳게 닫힌 현관문의 도어록 소리. 그 건조한 소리는 등 뒤로 남겨둔 바깥세상과 이쪽의 시간을 명확하게 가르는 경계선과도 같다. 센서 등의 불빛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려, 거실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발을 들여놓는다.


온종일 타인의 요구와 업무의 소음, 재촉하는 목소리에 시달려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막이 그제야 멍한 정적을 허락한다. 넥타이를 풀어내고 겉옷을 옷걸이에 거는 동작은 유난히 느릿하다. 섬유 올마다 묻어온 거리의 미세먼지와 긴장, 알게 모르게 어깨를 짓누르던 시선들을 털어내려는 듯, 묵직한 무게를 바닥으로 툭 내려놓는다.


욕실로 들어서서 뜨거운 물줄기 아래 한참을 머문다. 타일 바닥을 때리는 낙수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거울 속 사내의 얼굴은 아침 출근길보다 한 뼘 더 늙어 있고, 물기에 젖은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흐릿하다. 수건으로 물기를 훔치고 방 한구석, 작은 책상 앞으로 다가가는 그 짧은 이동. 몇 발자국에 불과한 그 걸음이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스탠드 조명을 밝힌다. ‘탁’ 하는 마찰음과 함께 노란 광원이 원형을 그리며 네모난 가구 위를 비춘다. 빛의 둘레 안으로, 낮 동안 처리해야 했던 결재 서류들과는 전혀 다른 질감을 가진 종이 묶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사각의 좁은 영토 위에 쌓인 서적들은 제각기 다른 높이로 탑을 이루고 있다. 은퇴 이후의 자산 흐름을 다룬 경제서부터 사춘기 자녀와의 대화를 위한 심리학, 매일같이 갱신되는 디지털 도구 매뉴얼, 중년의 내면을 응시하는 인문서까지. 이것들은 단순히 흥미를 위해 놓인 게 아니다. 생존을 위해, 혹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한 과제들인 셈이다.


표지에 내려앉은 먼지를 검지 끝으로 가볍게 쓸어 본다. 문득 손끝을 파고드는 책상의 차가운 감촉이 아주 오래전, 잊고 있던 덜 마른 한 장면을 길어 올린다.


정답 없는 문제를 푸는 자리


30년 전, 독서실 칸막이 너머의 풍경이 망막에 맺힌다. 당시 내 자리에는 손때 묻은 사전과 문제집들, 좋아하는 가수의 테이프가 담긴 소형 카세트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합판 귀퉁이에는 커터 칼로 깊게 새긴 ‘성공하자’라는 글씨가 선명했고, 그 아래엔 지우개 가루가 눈처럼 수북했다.


그 무렵의 책상은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손에 잡힐 듯한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출발선이었다. 허나 지금 눈앞에 놓인 공간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카세트플레이어 대신 충전선에 연결된 스마트 기기가, 참고서 대신 이번 달 카드 명세서와 건강 검진 결과표가 한쪽으로 밀려나 있다. 투박한 나무 흠집 대신 강화유리의 매끄러움이 손바닥에 닿지만, 그 위에 놓인 삶의 중력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하다.


과거엔 정답이 존재하는 문제를 풀었으나, 지금은 해답이 없는, 어쩌면 답을 직접 창조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는 탓이다. 학창 시절에는 정해진 트랙을 숨 가쁘게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반면 지금 마주한 이 공부는 지도 없는 험지 앞에서 어디로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는 과정, 고작 지팡이 하나를 깎기 위해 멈춰 서 있는 시간에 가깝다.


의자를 당겨 앉는 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깬다. 노트를 펼친다. 사각거리며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증폭되어 들린다. 백지가 주는 막막함보다는, 무엇이라도 적어 내려가며 흐릿해진 삶의 윤곽을 펜으로 꾹꾹 눌러 그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먼저 손끝을 타고 오른다.


은퇴 후의 자금 흐름을 계산해 보는 손길은 단순히 통장의 숫자를 늘리려는 욕심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구체적인 수치로 묶어두려는 본능적인 방어 기제 때문이다. 글쓰기를 배우며 문장을 다듬는 행위는 엉킨 생각을 가지런히 빗어내는 치유가 되고, 심리학 책을 읽으며 타인의 마음에 닿는 법을 익히는 일은 관계에서 오는 흉터를 미리 예방하려는 노력일 테다.


펜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지면 상단에 오늘 정리해야 할 주제들을 나열해 본다. ‘이번 달 고정 지출 흐름 파악’, ‘업무 효율을 위한 앱 사용법’, ‘아이와 대화할 때 눈 맞추기’, ‘오늘의 감정 기록’. 글자 하나하나를 눌러쓸 때마다 낮 동안 여기저기 부딪히며 흐트러졌던 중심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 고요한 자리는 벼랑 끝에 선 나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지반이 된다. 불빛 아래서 나는 학생이 아닌 생활인으로서, 가장으로서, 그리고 늙어가는 한 인간으로서 펜을 움켜쥔다.


등 뒤로 남는 밤의 냉기


잠깐의 정리를 마친 노트를 가방에 챙겨 넣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선다. 방금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기분은 묘하다. 쉰다는 안도감이 채 스며들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야 하는 피로가 허리를 시큰하게 만들지만, 신발을 고쳐 신는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다. 구두 주걱 대신 손가락을 넣어 뒤축을 단단히 당겨 신는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덮친다.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서늘한 기운이 나른했던 정신을 날카롭게 깨운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모습은 아침 출근길보다 조금 흐트러져 있고, 퇴근길보다는 한층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다. 넥타이는 풀려 가방 속에 들어 있고, 셔츠 윗단추 하나가 풀려 있다.


오늘 찾아가는 강의실의 주제는 ‘중년 이후의 커리어 전환’이다. 익숙해진 직장, 매달 25일이면 어김없이 들어오는 월급, 내 이름이 박힌 자리가 확실한 사무실이 있지만 그 안온함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육체가 먼저 기억한다. 조직도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요동치고, 맡은 역할의 유효기간을 장담할 수 없는 시대다. 명함 한 장만 붙들고 있기에는 발밑이 너무도 허전하다.


강의 안내문에 적혀 있던 문구들이 뇌리를 스친다. 이력서 재구성, 온라인 포트폴리오 제작, 데이터 분석 기초 역량. 낯선 어휘들이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생존의 언어들이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정류장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걷는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바닥에 누운 검은 형상은 실재하는 나보다 훨씬 길고 지쳐 보인다. 가방끈을 꽉 쥐어 본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무게감은 종이의 질량인가, 아니면 내가 짊어진 가장의 짐인가.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잠시라도 멈춰 섰다가는 가장 먼저 가장자리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등을 떠민다. 지금의 걸음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야망이라기보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바닥을 꽉 디디는 생존의 몸부림에 가깝다.


‘지금 시작한다고 해서 정말 다른 길이 열릴까?’


발을 뗄 때마다 의구심이 그림자처럼 발목을 잡아챈다.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젊은 세대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허나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가지고 길을 나선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이 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완전히 멈춰 서지는 않았다는 증명이 된다고 믿을 뿐이다.


복도에서 교차하는 시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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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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