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빠르게 살수록 더 느리게 돌아와야 하는 이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잠시 멈춰 선 당신을 위한 밤의 철학

by 정성균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는 의식


철제 현관문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서 사라질 때, 바깥세상의 문은 닫힌다. 등 뒤에서 도어록이 잠기며 울리는 건조한 전자음은 하루라는 긴 문장의 마침표처럼 들리는구나. 그 소리는 소음과 속도의 제국, 타인의 시선이 지배하던 영토에서 나를 안전하게 구출하는 신호와도 같지 않은가? 문이 닫히는 순간, 비로소 ‘사회적 나’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을 자격이 주어진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기의 질감이 바뀌는 것을 느껴봐라. 하루 종일 고막을 때리던 도시의 데시벨이 사라진 그 진공의 틈으로, 묵직한 정적이 밀물처럼 들이닥쳐 방 안을 채우기 시작한다. 심해 잠수부가 물 위로 올라올 때 감압의 시간이 필요하듯, 속도에 중독되어 질주하던 우리에게도 멈춤을 위한 완충 지대가 절실하다. 현관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며, 너무 빨리 달리느라 뒤처진 영혼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벗어둔 신발들이 제각각 방향으로 널브러져 있네. 어둠 속에서 비스듬히 누운 구두의 닳아버린 뒷굽을 가만히 응시한다. 서로 다른 각도로 마모된 저 굽의 기울기는 오늘 하루 내 몸이 감당해야 했던 중력의 지도이자, 치열했던 생존의 기록이다. 때로는 굽히고, 때로는 버티느라 비틀거렸던 발목의 시린 역사가 저 굽 속에 담겨 있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굽힌다. 손끝으로 가죽의 피로한 질감, 자잘한 주름과 상처를 어루만진다. 그리고 구두코를 문 쪽으로, 내일 아침이면 다시 걸어 나가야 할 세상의 방향으로 정성스럽게 돌려놓는다. 누군가는 강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게 이 행위는 하루를 봉인하는 엄숙한 제의(祭儀)다. 흐트러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은 발목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던 세상의 인력을 스스로 풀어주는 해방의 몸짓에 가깝다. 현관을 정리하고 나서야 밤은 낮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흐름을 시작하는 것이다.


중년의 귀가란 팡파르 없는 개선(凱旋)과 닮아 있다. 요란한 환영 인사 대신 사물들의 침묵이 먼저 마중을 나오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승모근의 긴장이 바닥으로 툭, 하고 소리 없이 떨어진다. 양말을 벗은 맨 발바닥이 마루의 서늘한 나뭇결을 읽어낸다. 낮 동안의 나는 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개며 달렸으나, 이곳의 시간은 액체처럼 느리게 흐르거나 고요히 고여 있다. 이제야 깨닫게 된다. 이 시기는 화살처럼 날아가는 속도가 아닌, 바닥으로 침전하여 층을 이루는 깊이로 증명된다는 것을.


흐릿함이 주는 위로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는다. 헐렁한 면바지와 낡은 티셔츠의 감촉이 피부에 닿을 때, 비로소 혈액이 다시 돌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낡은 나무 의자가 '삐걱' 하고 척추의 무게를 받아낸다. 오랜 친구가 건네는 안부 인사 같은 소리다. 습관처럼 스탠드를 켜려던 손을 멈춘다. 너무 밝은 빛은 때로 폭력적이지 않니? 숨고 싶은 기미와 감추고 싶은 피로까지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탓이다. 밤에는 어둠이 적당히 섞여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법이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가로등 불빛이 책상 위를 아주 느리게 기어가는 것을 응시해 봐라. 빛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나무 책상의 흠집과 나이테 사이를 유영한다. 사물들은 낮의 명확하고 공격적인 형태를 버리고 부드러운 실루엣으로 뭉개진다. 날카로웠던 모서리가 어둠 속에서 둥글어지지.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 흐릿함이야말로 밤이 우리에게 건네는 선물이다. 세상 모든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정의 내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놓여나는 시간이다.


생각이 헝클어질 때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애쓴다. 인과관계를 규명하고 결론을 내리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다. 그러나 지금 이 공간, 어스름한 빛 아래서는 모든 판단을 유보한다. 판단을 멈추는 순간, 비로소 휴식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그저 내 호흡이 쇄골 아래를 지나 명치끝으로, 다시 배꼽 아래 단전으로 내려가는 그 기나긴 통로를 관찰할 뿐이다. 날숨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갈 때, 몸속의 뜨거운 기운도 함께 빠져나가지. 안개가 낀 날 먼 곳을 보는 대신 발밑을 보듯, 지금은 먼 미래보다 내 마음의 발밑을 볼 시간이다.


가슴 한복판을 둔탁하게 두드리는 정체불명의 조바심이 감지될 때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면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의 뚜껑을 연다. 그리고 닫는다. '딸깍'. 금속과 금속이 맞물리는 그 명징하고 건조한 파찰음! 그 작은 소리의 떨림이 공기 중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궤적을 눈으로 좇아본다. 다시 한번, '딸깍'. 이 단순한 소리에는 거짓이나 과장이 없다. 오직 물리적인 사실만이 존재한다. 그 명료함이 소란하던 마음의 부유물을 바닥으로 가라앉힌다. 관찰하는 동안 문제는 작아지고, 나는 본래의 크기를 되찾는다.


몸을 움직여 마음을 닦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막막함이 예고도 없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와 내 방의 주인 행세를 한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곤혹스러운 오후, 구체적인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면? 그럴 때 나는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일체의 말을 멈춘다. 언어는 때로 불안을 증폭시키는 연료가 되기에, 대신 몸을 아주 작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시던 물 컵을 들어 올린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컵의 무게, 입술에 닿는 도기의 매끄럽고 차가운 질감을 느껴봐라. 물을 한 모금 삼킨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물줄기의 서늘함을 추적해 보는 것은 어떤가? 다시 컵을 내려놓을 때는 컵 받침 위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폭발물을 다루듯 아주 천천히 안착시킨다. 이 극도의 신중함이 흩어진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는구나. 컵을 내려놓는 그 짧은 순간, 나는 내 우주의 통제권을 되찾는다.


식탁 위, 남들은 보지 못하는 희미한 얼룩을 행주로 닦아내라.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닦는다. 손목의 규칙적인 회전, 행주가 식탁 표면을 스치는 사각거리는 소리. 그 반복되는 움직임이 제멋대로 뛰던 심장의 리듬을 부드럽게 조율한다. 규칙적인 움직임 속에서 혼돈은 서서히 잠들기 마련이다.


명확한 이유를 찾으려 들면 불안은 덩치를 키우는 법이다. 질문을 멈추고 나는 베란다로 나간다. 창가에 놓인 고무나무 잎사귀를 닦는다. 잎맥을 따라 켜켜이 쌓인 먼지를 젖은 천으로 훔쳐내는 움직임에 집중해 본다. 초록 잎의 매끄러운 앞면과 거친 뒷면의 차이를 손끝으로 확인한다. 그 촉각적인 경험이 복잡하게 얽힌 신경망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준다. 시든 잎을 골라내고 흙의 마름 정도를 손가락으로 찔러 확인하는 동안, 허공에 붕 떠 있던 마음은 비로소 젖은 흙냄새를 맡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식물은 말이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 묵직한 존재감이 나를 위로하는구나. 내가 그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돌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감정의 무게를 손끝의 느낌으로 바꾸어 보자. 슬픔을 억누르는 대신 산책을 나서며 발바닥에 닿는 보도블록의 요철을 세어보고, 분노를 삼키는 대신 마른빨래를 개며 섬유 유연제 향기와 햇볕에 마른 면직물의 따뜻함을 손바닥 지문 사이로 밀어 넣어봐라. 몸을 움직이는 동안 마음은 잠시 쉴 곳을 찾는다.


소유로부터의 망명


마음이 조금 정돈되자 시선은 방 안의 물건들로 향한다. 주말 오후, 볕이 베란다 깊숙이 들어와 눕는 시간. 나는 구석에 쌓여 있던 묵은 짐들을 끄집어낸다. 창고 깊숙한 곳은 내 무의식의 쓰레기장이다. 3년째 한 번도 켜지 않아 옷걸이가 되어버린 러닝머신, 살이 빠지면 입겠다며 10년째 모셔둔 꽉 끼는 청바지, 언제쯤 다시 손보겠다며 선반에 묵혀 둔 고장 난 오래된 카메라. 먼지를 뒤집어쓴 그 물건들은 단지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로 머물지 않는구나. 그것들은 ‘실패한 계획’이자 ‘지키지 못한 약속’들의 무덤처럼 보인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둘씩 꺼내 쓰레기봉투에 담는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정성균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572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10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