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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했던 감정의 이름들

오래된 기억이 다시 나를 불러낸 순간

by 정성균

1장: 말하지 못한 감정의 무게


우리의 삶에 짊어진 묵직한 부담이 혹독한 고통 그 자체만은 아닐 것입니다. 감정을 언어로 남김없이 풀어내 정리하지 못한 채 쌓아둔 '비언어의 응어리',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진짜 몫이었습니다. 이름 없이 마음속에 갇혀버린 감정은 세월이 흘러도 녹지 않고, 내면 깊은 곳에 돌덩이처럼 박혀 우리의 마음을 끈질기게 무겁게 만듭니다. 이 짐은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며, 현재 내리는 선택에도 은밀한 영향을 줍니다.


묵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길은 과거를 그저 되돌아보는 회상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해독자의 시선으로 기억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숨어 있던 감정에 새롭고 주체적인 이름을 붙여주는 치열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묵은 짐을 털어내고 진정한 편안함을 찾는 확실한 길이 바로 이 과정에 있습니다. 왜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고 '비언어의 무게'로 묶어두었는지, 그 근원을 먼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장: 말없음이 만든 정서적 족쇄 – 과거에서 현재까지


말없음이 우리 삶에 이토록 오랫동안 짐이 되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근원적이고 뿌리 깊은 이유를 들여다봅시다. 우리가 경험했던 고독한 정적은 성격 탓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평범한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사회가 성과만을 앞세우며 감정을 억압했던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말로 표현할 언어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던 '언어의 부재'가 만들어낸 거대한 마음의 빈자리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취약한 모습이나 불안을 '나약함의 증거'로 치부하며 숨기도록 종용했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은 어른들의 불안, 가족의 슬픔, 혹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여과 없이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해결하거나 이야기할 단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 아이들은 심지어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도 감정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대신, 말없이 가만히 있는 상태로 묵인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편이라고 몸이 먼저 반응했던 것입니다. 그 시절, 저녁 뉴스 소리는 늘 불안했고, 집 안의 공기는 왠지 모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말로 나오지 못한 감정들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꽁꽁 묶여 단단한 정서적 사슬이 되어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 깨닫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그 말없는 상태가 우리를 지켜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병을 고치고 완벽하게 성장하는 길을 수십 년간 막아온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름 없이 남은 감정 덩어리가 결국 '정서적 해방을 막는 견고한 족쇄'를 만든다는 것은 많은 이의 공통된 경험입니다. 이 족쇄를 끊고 건강하게 감정을 순환시키기 위해서는, 묶여버린 감정을 풀어줄 언어를 되찾고 그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는 일이 절실합니다. 과거의 무거운 짐을 현재의 귀한 지혜로 바꾸는 가장 의미 있고 주체적인 일이 바로 이 과정에서 시작됩니다.


3장: 봉인된 기억이 남긴 흔적들 – 뒷모습과 남겨진 물건


이름 없이 갇혀 있던 기억은 우리의 현재에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요? 우연히 스쳐 지나간 낡은 철거 현장의 냄새 때문에, 수십 년 전 과거 뒷모습의 주인공이 남긴 중요한 기억을 다시 불러냈습니다. 이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은 회상이라 부르기엔 부족했고, 후각이 무의식의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해독 작업에 가까웠습니다.


뒷모습의 무게와 개인적 고독의 흔적

노란 햇살 아래 홀로 앉아 있던 그 사람의 등에는 당시의 제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짐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존재는 자신의 힘든 시기를 누구에게도 말없이 혼자 감당했습니다. 저는 그 등 뒤에서 무겁고 외로운 '말없음'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뒷모습은 제가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익힌 정서적 단절과 시대의 외로움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에게도 여전히 그 정적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중요한 짐으로 남아 있습니다. 말로 풀지 못한 그 외로움은 내면의 차가운 빈 공간에 고착되었습니다. 종종 비언어적 감정은 이처럼 심리적 방패나 마음의 장벽으로 작동하곤 합니다.


덧붙여진 감각의 증거

뒷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손이, 복도 난간의 차갑고 거친 쇠붙이를 무의식적으로 쥐고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던 그 서늘한 금속의 감촉은, 불안하고 복잡했던 감정의 상태를 고스란히 저장해 둔 또 하나의 증거였습니다. 기억은 시각뿐 아니라 촉각의 형태로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남겨진 물건과 비언어적 유산의 전이

그분이 떠난 뒤 방에 남아 있던 낡은 가죽 지갑은 물건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은 그 지갑처럼 단단한 감각의 잔여물로 남아 제 안에 화석처럼 박혀 있습니다. 이름 없이 갇힌 채 남은 기억의 조각들은 현재의 정서 반응에 영향을 미칩니다. 불안을 회피하거나 중요한 결단을 주저하게 만드는 양상을 그 물건들이 말없이 증명하는 듯합니다. 감정의 유산은 말 대신 물건의 촉감이나 공간의 분위기, 혹은 몸이 기억하는 패턴으로 우리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소셜 미디어가 만든 '행복 강박'의 족쇄

이러한 '말없음의 구속'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완벽하고 행복한 모습'에 대한 강박이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가 확산시키고 있는 이 강박은 우리 속마음의 불안과 고통을 계속 억누르게 합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집단적인 침묵이라는 새로운 감옥에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억압은 과거의 시대적 압력과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같습니다.


과거와 현재: 형태만 다른 침묵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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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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