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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감정의 색은, 아직 이름이 없다

- 견디는 하루의 기록 -

by 정성균

여명(黎明), 가장자리에서 시작되는 빛


빛이 먼저 와 있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 감긴 눈꺼풀 너머로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부드러운 회색 입자들이었다.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와 벽지에 내려앉은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날카로운 창이라기보다 나의 동의 없이 하루를 밀어 넣는 무심한 손길에 가까웠다. 나는 눈을 떴다. 몸은 이불속에 무겁게 잠겨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아무런 낙인도 찍히지 않은 백지상태였다.


하루는 늘 포장지를 뜯기 전의 설렘보다는, 폭발 직전의 팽팽한 침묵으로 도착한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발바닥을 마루에 대었을 때,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는 나를 깨우는 자극인 동시에 경고였다. 이 짧은 순간, 나의 내면은 평온한 ‘진공’ 상태가 아니다.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채워야만 하는 강박. 단 한 번의 붓질 실수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될 수 있다는 서늘한 공포. 나는 이 하얀 시간이 주는 압력을 가만히 응시한다. 빈 종이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때로 형벌처럼 무겁다.


욕실로 들어선다. 거울 속에 한 남자가 서 있다. 밤사이 자라난 수염과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꾸미지 않은, 가장 솔직한 내 모습이다. 수도꼭지를 틀자 쏟아지는 물줄기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 시원한 물을 얼굴에 끼얹는 순간, 피부가 수축하며 생의 감각이 돌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다시 거울을 보았을 때, 무표정해 보이던 얼굴 위로 수만 가지 기분이 겹쳐져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제의 피로도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고, 오늘의 기대도 섞여 있으며, 막연한 불안도 얇은 막처럼 깔려 있었다. 빛을 합치면 투명해지듯, 나의 아침 얼굴은 모든 감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가장 예민한 상태였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모호함을 안고 현관을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 도어록이 ‘지잉- 척’ 하며 자동으로 잠기는 기계 소리가 났다. 건조하고 정확한 그 소리는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신호이자, 안전한 성벽 밖으로 나가는 사람의 긴장된 심장 소리였다.


1분의 형벌, 그리고 건조한 안부


도시의 아침은 서로 다른 속도의 소음들이 겹쳐진 상태다. 신호를 기다리는 자동차의 숨 고르는 소리, 인도를 가르는 구두굽, 막 문을 연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한꺼번에 얽혀 있다. 정류장으로 향하는 넓은 인도를 걸으며 그 소음의 결을 몸으로 통과한다. 요즘은 일부러 차를 두고 나온다. 복잡한 도로 위에서 핸들을 꽉 쥐고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 긴장감보다,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버스의 무심함이 필요해서다.


버스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에 앉는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엔진의 미세한 진동을 온몸으로 느낀다. 덜컹거리는 리듬에 몸을 맡긴 채 그저 얹혀가는 기분을 허락한다. 잠시 후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마트폰을 꺼집어낸다. 그 안에는 내가 적어 둔 글들이 있다. 며칠 전 새벽에 남긴 문장, 아직 매만지지 못한 단락, 이유 없이 저장해 둔 문구들이 손끝을 따라 조용히 스크롤된다. 움직이는 풍경 위로, 내가 써 온 생각들이 겹쳐진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유리 광고판에 비친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문득 수십 년 전 초등학교 교실의 풍경이 떠올랐다. 비가 쏟아지던 날, 창밖을 바라보던 어린 나. 그때 나는 ‘빗줄기’라는 벽 뒤에 숨어 안전함을 느꼈다. 그 기억은 나를 지탱하는 뿌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얼마나 숨는 것에 익숙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흔적이기도 하다.


버스가 도착했다. 치익,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앞문이 열렸다. 나는 기억을 정류장에 버려두고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밀려나던 생각들은 몇 정거장을 지나며 점점 힘을 잃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몸은 이미 다음 역할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윙’ 하고 울리며 일상의 시작을 알렸다. 이곳은 내가 사회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공간이다. 동시에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버스에서 잠시 내려놓았던 감정들은 이 자리에서 다시 호출된다.


오후 2시, 햇살이 나른하게 책상 위로 쏟아질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누군가 타 마시는 믹스커피의 달큼한 냄새가 났고,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만이 건조한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때, 엎어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지잉’. 나른함을 깨우는 떨림이었다. 화면을 뒤집었다. ‘K’였다.


3년 전, 사소한 자존심 싸움으로 연락이 끊겼던 친구. 마음 한구석에 늘 작은 돌멩이처럼 걸려 있던 이름.


[잘 지내냐.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나는 그 문장을 눈으로만 읽었다. 반가움인지 당혹감인지 알 수 없었다. 3년의 침묵을 깨는 말이 고작 ‘그냥’이라니. 목 안쪽이 까슬했다.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메신저를 열어둔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반갑다.’

(너무 딱딱한가?)


‘어, 오랜만이네.’

(너무 거리를 두는 건가?)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쿨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결국 가장 평범한 말을 골랐다.


‘나도 안 그래도 네 생각 종종 했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1분, 2분. 그 짧은 기다림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너무 성급했나. 괜한 말을 덧붙였나. 내 ‘긍정’이 오답이었을까 봐 가슴이 조여왔다.


3분이 지났을 때, 짧은 답장이 왔다.


[살아있네.]


그게 다였다. 이모티콘도, 느낌표도 없었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게 K였다. 드라마틱한 화해나 눈물겨운 우정 같은 건 우리 사이에 없었다. 하지만 그 건조한 세 글자가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우리가 3년의 공백을 건너뛰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는 사이라는 증거였으니까.


명치끝에 걸려 있던 돌멩이가 모래알처럼 작게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이제는 견딜 만한 이물감이었다. 휴대폰을 엎어두었다. 창 너머의 하늘이 조금 더 맑게 보였지만, 눈이 시릴 만큼 쨍하진 않았다. 딱 견딜 만큼, 적당히 밝은 오후였다.


탁해짐의 미학, 섞이는 세계


퇴근길, 나는 곧장 집으로 향하는 대신 골목 안쪽의 작은 커피숍으로 발길을 돌렸다. 딸랑, 하고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서 나는 비유를 멈춘다.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감각에 집중한다. 가방 끈을 어깨에서 내려놓는 느낌,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둔탁한 소리, 컵받침에 맺힌 차가운 물기. 이 모든 사소한 감각들이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건너편 테이블의 말소리는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남의 삶이 내 삶을 침범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묘한 안도감이 있었다.


가방에서 작은 노트와 손때 묻은 브랜드 샤프펜슬, 그리고 색연필 몇 자루가 담긴 필통을 꺼냈다. 필통을 열자 색연필 특유의 마른나무 냄새가 훅 끼쳐 왔다. 하루의 기분을 기록하는 시간. 나는 빈 종이를 앞에 두고 샤프를 쥐었다. “오늘 나의 감정의 색은...”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장을 적어 내려가던 손이 멈췄다. 필통 속에 함께 들어있던 색연필들을 내려다보았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이 선명하고 깨끗한 색들로는 오늘의 나를 설명할 수 없었다. 오늘 나는 K의 문자에 설렜지만(분홍), 답장을 기다리며 불안했고(회색), 그의 무심한 답장에 서운하면서도 안도했다(갈색).


나는 파란색 색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주황색을 덧칠했다. 기대했던 보라색은 온데간데없고, 탁한 진흙색만 남았다. 나는 멈추지 않고 그 위에 다시 노란색을, 그리고 연필로 검은색을 입혔다. 종이 위에서 색들은 예쁘게 섞이지 않았다. 서로 밀어내고, 뭉개지고, 얼룩덜룩해졌다. 깨끗하지 않았다.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지우개를 들지 않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탁한 색은 해 질 녘 도시의 하늘색과 닮아 있었다. 낮의 환함과 밤의 어둠이 뒤섞여 싸우다가, 결국 서로에게 스며들어 만들어낸 오묘한 잿빛. 이름은 없다. 이 색은 ‘희망’이라 부르기엔 어두웠지만, ‘절망’이라 하기엔 제법 묵직한 질감이 있었다.


나는 그 뭉개진 색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지문 사이로 색이 번졌다. 종이의 거친 표면이 손끝에 닿았다.


“그래, 이게 나지.” 매끈하게 정리되지 않은 마음. 쿨하게 넘기려 했지만 찌꺼기가 남은 관계. 상처와 치유가, 불안과 안도가 엉겨 붙어 만들어낸 이 탁한 색이야말로 거짓 없는 오늘의 나였다. 여러 색이 엉겨 붙은 자리는 물감의 두께로 툭 불거져 있었다. 거칠고, 두터웠다.


아직 식지 않은 밤


커피숍을 나섰을 때, 거리는 밤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하늘은 화려한 별빛 대신 무거운 어둠을 깔아주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지만, 모든 길을 밝혀주지는 못했다. 어두운 곳은 어두운 대로, 밝은 곳은 밝은 대로 남겨진 거리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볍지는 않았다.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K와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내일 또다시 어색해질 수도 있고, 다시 연락이 끊길 수도 있다. 오늘의 용기가 해피엔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결과를 얻지 못했어도, 연결을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면 충분했다.


방으로 돌아와 스탠드를 켰다. 아침에 보았던 그 방이다. 아침의 여백으로 가득했던 방은 이제 하루의 밀도로 꽉 차 있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보았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검은 액정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차가운 기계 속에, 오늘 내가 보낸 망설임과 그가 보낸 무심한 안부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오늘 나의 감정에는 여전히 이름이 없다. 그것은 행복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엔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안도감이라고 하기엔, 가슴 안쪽 깊숙이 무언가 차오르는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굳이 이름 붙여서 가두고 싶지 않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가 엉망으로 섞여버린 물감 같다고 해서 실패한 그림은 아니다. 덧칠하고 뭉개진 그 자국들이야말로, 내가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낸 붓질의 증거일 테니까.


밤이 깊어진다. 하루를 온전히 견뎌낸 피로가 이불의 압력과 함께 나를 누른다. 나는 억지로 내일의 희망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저 내 몸에 남은 오늘의 잔열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그래, 아직 식지 않았어."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닌, 입안에서 맴도는 혼잣말이었다. 나는 그 투박한 숨을 이불속에 가두고, 깊은 잠을 청한다. 오늘 나의 감정의 색은 이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밤을 무너지지 않고 지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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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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