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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편집되지 않는다

컷 없는 삶을 살아낸 사람의 기록

by 정성균

새벽 4시, 기계음


새벽 4시. 어둠의 점도가 가장 끈적한 시간이다. 정적을 찢고 알람이 운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인가? 아니, 저것은 아직 숨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는 기계적인 신호일뿐이다.


소리가 울리기 전부터 나는 눈을 뜨고 있었다. 마치 정밀한 계측기처럼, 내 몸은 오늘 짊어져야 할 중력의 무게를 본능적으로 안다. 지난밤의 잠은 쉼이 아니었다. 다음 전투를 위해 잠시 전원을 내려둔 기절, 혹은 거친 숨 고르기였다.


천장을 스크린 삼아 뇌 속의 메일함을 연다. 답장을 미룬 독촉들, 마침표를 찍지 못한 문장들이 집요하게 뇌의 주름을 긁어댄다. ‘잃어버림’이 무거우니 ‘없음’으로 고칠까. 토씨를 바꿨다, 되돌렸다, 지운다. 이불을 개면서도 나는 보이지 않는 원고지 위를 서성인다.


완벽한 문장을 찾기 전엔 방문을 나서기 싫다는 고집. 이 새벽 책상에 앉는 건 열정이 아니다. 나의 바닥을 들킬까 두려워 시간을 벌어보려는, 겁먹은 영혼의 몸부림이다.


거울 속, 지워지지 않는 낙인


욕실의 형광등이 껌벅이며 켜진다. 퉁퉁 부은 눈, 까치집 지은 머리. 거울 속 낯선 중년 사내가 나를 노려본다.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얼굴이다. 시선이 오른쪽 뺨에 멈춘다. 거북목을 펴보겠다고 큰맘 먹고 바꾼 ‘마사지 엠보싱 베개’. 그 흔적이 선명하다.


올록볼록한 돌기에 눌린 붉은 살점이 벌집처럼, 혹은 징그러운 낙인처럼 박혀 있다. 문질러도 요지부동이다. 찬물 세수 한 번이면 고무공처럼 튀어 오르던 이십 대는 증발 했다. 이제 저 자국은 점심때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어, 나의 쪽잠과 늙음을 세상에 광고할 테지.


‘일찍 잘 걸’, ‘뒤척이지 말 걸’…. 칫솔질 박자에 맞춰 비루한 후회들이 입안의 거품처럼 부풀었다, 꺼진다.

이것은 예고편이 아니다. 지울 수도, 되감기도 불가능한 날것 그대로의 생방송이다.


달리는 쇳덩이, 유예된 풍경


현관을 나선다. 내가 사는 지방 도시의 새벽 공기는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바람을 막아줄 빌딩 숲이 없는 이곳. 가속을 붙여 달려온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살갗을 저민다.


조수석에 가방을 던진다. 쿵. 둔탁한 파열음이 차 안에 울린다. 들어보지 않아도 묵직하다. 비도 안 오는데 챙긴 3단 우산, 벽돌 같은 배터리, 첫 장도 넘기지 않은 두꺼운 책. 단순한 잡동사니가 아니다. 부피를 가진 나의 불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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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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