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가 움직인다. 화면 위로 낯선 중년 남자의 피로한 얼굴이 떠올랐다 침몰한다. 판결은 3초 안에 끝난다.
스마트폰 액정 위로 타인의 삶이 유령처럼 미끄러진다. 멈추지 않고, 사유하지 않으며, 오직 반사 신경으로 대상을 분류한다. 판단의 근거는 프로필 사진 밑에 적힌 몇 줄의 바이오(Bio)다. '구독자 00만', '연 매출 00억', '베스트셀러 작가'. 짧은 단어들의 조합이 한 인간의 등급을 매긴다. 팔로워의 숫자가 발언의 권력이 되고, '좋아요'의 개수가 존재의 부피를 결정한다. 이곳에서 인간의 존엄은 환금 가능한 데이터 수치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이 디지털 명찰을 자아라 믿었다. 프로필을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하는 데 골몰했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기보다, 얼마나 '있어 보이는지' 증명하는 일이 시급했으므로. 타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본질이 아닌 전시된 숫자였다. 그러나 화면이 꺼진 검은 액정, 그 암흑(Darkness) 위에 비친 얼굴은 늘 공허했다. 접속이 끊기면 연기처럼 흩어질 데이터 조각을 붙들고 안도하는 삶. 그것은 삶이 아니었다. 생명을 흉내 내는 정교한 홀로그램일 뿐이었다.
이 글은 화려한 프로필 뒤에 유폐된 진짜 '나'를 찾아가는 로그(Log)다. 인간의 실존은 서버에 저장된 기록과 무관하다. 오직 오늘 내 손끝에 닿는 현실의 감각으로만 판가름 난다. 이제 픽셀로 된 허상을 걷어내고, 비로소 땀 냄새나는 삶의 질감을 이야기하려 한다.
기억을 복기한다. 트위터(Twitter)라는 광장에 빠져 지냈던 시절, 내 계정은 꽤 번잡했다. 타임라인에 무심코 던진 문장 하나가 순식간에 수백 번씩 리트윗(RT)되고, 하루 300개가 넘는 알림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때, 나는 도파민에 잠식당해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수천의 군중이 내 말에 반응한다는 사실은, 마치 대단한 권력자가 된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그때부터 '보이는 나'를 연기했다. 위트 있고, 날카로우며, 시류를 읽을 줄 아는 배역. 지질한 감정이나 실패의 얼룩은 트윗 창에서 가차 없이 지웠다. 브랜딩이라는 미명 아래, 나라는 사람을 140자(트위터 초창기의 절대적 한계였다)의 납작하고 매력적인 텍스트로 가공했다. 팔로워 숫자가 불어날수록 역설적으로 내면은 빈곤해졌다. 익명의 환호에 기생하는 자존감은 모래성보다 위태로웠다.
친구의 고해성사조차 건성으로 들었다. 머릿속은 온통 이 상황을 어떻게 요약해야 '알티(RT)'를 많이 탈까 하는 계산뿐이었다. 2009년 11월 28일, KT가 아이폰 3GS를 출시하며 한국에 스마트폰 시대가 개막했던 무렵. 140자의 제약과 시간순으로 흐르는 타임라인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절.
그때의 나는 주인이 아니었다. 타임라인이 흘려주는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꼬리를 흔드는 짐승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은 소통의 도구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나를 24시간 감시하고 옥죄는 '디지털 목줄'이었다. 스스로 목줄을 채우고, 감옥 안에서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불안이 임계점에 달해 신경증적인 징후가 보일 무렵,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펼쳤다.
2000년 전,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막사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쓴 로마 황제의 문장이 아이패드 화면 위로 떠올랐다.
“너를 화나게 하는 자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그가 어떤 판단 기준을 가진 자인지 본다면, 너는 그의 평판에 신경 쓸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첫 문장을 읽었을 때 전율했다. 이성은 완벽하게 동의했다. 그러나 책을 덮고 현실로 복귀하는 순간, 처참하게 무너졌다. 계정에 박힌 조롱 섞인 인용 트윗 하나, 이유 모를 공격적인 멘션 하나에 평정심은 살얼음판처럼 깨져나갔다. 화면 너머 얼굴 없는 유령들과 쉐도우 복싱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
철학은 안전한 서재를 벗어나, 소란스러운 타임라인과 '오류(Glitch)' 투성이의 현실에서 증명되어야 했다. "주어진 몫을 수행하라"는 가르침은, 모욕적인 비난 앞에서도 노트북을 덮지 않고 다음 문장을 기어이 적어 내려갈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다. 수없이 패배했다. 분노하고, 차단하고, 도망쳤다. 그 누추한 실패의 반복 끝에 깨달았다. 내면의 질서는 명언을 공유할 때가 아니라, 모욕을 견디고 과업을 지속할 때 성채를 쌓듯 조금씩 세워진다는 것을.
모두가 잠든 새벽 3시. 도시는 소등했으나 어딘가의 데이터 센터는 윙윙거리는 팬 소리로 웅장하다. 수만 개의 서버 랙 사이를 오가며 엔지니어들은 시스템을 사수한다. 그들이 과부하를 막고 보안 패치를 깔지 않는다면, 우리의 아침은 '접속 불가'라는 재난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이름 없이 묵묵히 케이블을 연결하고 온도를 체크한다. 그 고요한 노동의 시간에도, 타임라인 위로는 누군가의 화려한 성공담이 쉴 새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의 노동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 모두가 잠든 시각, 책상 앞을 지킨다. 내 노동의 도구에는 화려한 조명이 없다. 오직 닳고 닳은 키보드와 깜빡이는 커서만 존재할 뿐. 글을 쓴다는 것은 채움보다 비움에 가깝다. 방금 쓴 문장을 노려본다. 그럴듯해 보이나 진심이 거세된 문장, 화려한 수사로 본질을 가린 위선들이다. 백스페이스(Back space) 키에 손가락을 올린다.
'타닥, 타닥.'
글자가 지워질 때마다 살점을 도려내는 통증이 인다. 세 시간 공들여 쌓은 문단을 통째로 날려 보낼 때는 신음이 새어 나온다. 타협하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다시 자판 위에 손을 올린다. 독자에게 가 닿을 단 하나의 진실한 문장을 위해, 오늘 밤도 내 안의 허영을 삭제하고 또 삭제한다.
앱이 매끄럽게 구동되는 건 코드를 최적화한 개발자의 충혈된 눈 때문이고, 이 글이 당신의 마음에 닿는 건 밤새 허영을 지워낸 작가의 고뇌 덕분이다. 이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를 떠받친 기둥 뒤의 그림자를 더 신뢰한다.
두 명의 개발자가 있다. 한 사람은 모니터를 보며 "지겨운 버그 수정"이라며 한숨을 쉬고, 다른 한 사람은 "이 로직만 고치면 10만 명의 접속이 빨라진다"며 눈을 빛낸다. 물리적인 손가락의 움직임은 완벽히 같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오직 '해석'이다.
이 반복적인 업무가 거대한 시스템의 안정을 만든다는 자각. 이 엑셀 시트 한 장이 프로젝트의 오차를 줄인다는 믿음. 삶의 깊이는 직업의 이름이 아니라, 그 일을 바라보는 해석의 '해상도(Resolution)'에서 결정된다. 저해상도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지루한 반복이지만, 고해상도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경이로운 디테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모니터를 어떤 해상도로 응시하고 있는가.
소유란 구독자 수가 아니다. 내 시간과 감정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는 일이다. 나는 그 자명한 사실을, 너무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뼈저리게 알았다.
어느 저녁, 오랜만에 가족과 마주 앉은 식탁이었다. 아내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던 찰나, 식탁 위의 스마트폰이 '징-' 하고 울렸다. 조건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별것 아닌 알림이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내는 침묵으로 물러나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야, 나중에 이야기하자."
순간 깨달았다. 찰나의 진동에 반응하느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의 눈빛을 놓쳤음을. 알고리즘이 영혼의 주파수를 납치해 간 사이, 현실의 관계에는 회복할 수 없는 금이 가고 있었다.
자기 삶을 소유한다는 것은 '자동 재생(Auto-play)'을 멈추는 행위다. 남들이 선망하는 아이템이 떠도 내 취향이 아니면 거두는 것, 눈앞의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기꺼이 스마트폰을 덮는 것. 삶을 소유한다는 건, 인생의 타임라인을 알고리즘이 아닌 내가 편집한다는 감각을 되찾는 투쟁이다.
과거의 내가 타인의 피드를 훔쳐보며 비교 지옥을 배회했다면, 지금의 나는 의식적으로 '로그아웃'을 감행한다. 알림을 끄고 작업실의 창문을 연다. 모니터의 발열 대신, 창밖에서 밀려드는 서늘한 공기의 감촉을 느낀다.
비교를 멈추고 접속을 끊는 순간, 역설적으로 진짜 연결이 시작된다. 손끝에 닿는 키보드의 질감, 아끼는 펜의 무게, 곁에 머무는 가족의 숨소리. 이것만이 왜곡되지 않은 고해상도의 현실이다.
그 정적 속에서 자문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인가, 내가 진정 쓰고 싶은 글인가?" 이 질문은 와이파이 신호가 끊어진 뒤에야 명료하게 수신된다. 매일 다짐한다. 오늘 하루, 가상의 광장에 나를 전시하는 대신 내 방의 밀도를 높이겠다고. 그것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글을 마치는 지금, 스마트폰의 전원 버튼을 꾹 누른다. 빛나던 화면이 순식간에 암전 된다.
칠흑 같은 '검은 화면(Black Screen)' 위로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보정 앱으로 깎아낸 턱선도, 필터를 씌운 매끄러운 피부도 없는, 피로하지만 정직한 맨얼굴이다. 눈가에는 주름이 잡혀 있고, 입술은 조금 거칠다. 하지만 그 얼굴이 마음에 든다. '인플루언서'도 '전문가'도 아닌, 오늘 하루 내 몫의 현실을 온몸으로 감당해 낸 한 인간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접속은 끝났다. 이제 당신의 차례다. 제안한다. 지금 당장 손에 든 그 기기를 내려놓으라. 그리고 검은 화면에 비친 당신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라.
오늘 당신은 알고리즘이 시키는 대로 살았는가, 아니면 당신이 선택한 하루를 살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댓글창이 아닌 당신의 일기장에 적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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