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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표에서 나를 지우다

9시간전 brunch_membership's

회색 도시를 비우는 단 한 줄의 사유

나는 오늘 일정표에서 나를 지웠다. 펜이 그어놓은 선 위로 이름 붙지 않은 고요가 먼저 도착했다.

아침 눈을 뜨자마자 손목 위 워치가 짧고 날카로운 진동을 내뱉는다. 어두운 방 안,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린 푸른빛이 망막을 찌른다. 화면 속에는 어젯밤의 수면 점수와 산소포화도, 그리고 실시간으로 요동치는 심박수 그래프가 픽셀 단위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손목을 파고드는 실리콘 밴드의 눅눅한 압박은 본체 뒷면의 센서가 나의 생체 신호를 단 1초도 놓치지 않고 훑어내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 휴대폰 화면을 켜자 12월의 혹독한 미세먼지 수치를 알리는 빨간 점이 경고등처럼 깜빡이고, 그 아래로 처리해야 할 업무와 사람들의 이름이 푸른 알림 창 속에 빽빽하게 줄을 서 있다. 이 정교한 데이터 기록들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증거 같으면서도, 나를 보이지 않는 사슬로 묶어두는 차가운 금속 굴레와 같다.

나는 오랫동안 세상의 풍경을 수집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을 해왔다. 매일 마주하는 사소한 사건들을 관찰하고 사유의 그물로 건져 올려 원고지 위에 나열하는 것이 일과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은 삶을 체험이 아닌 소재의 수집으로 전락시켰다. 수많은 단어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정작 내면은 이름 붙이지 못한 갈증으로 가득했다. 마감 전날까지 빈 화면만 바라보다 끝내 저장조차 하지 못한 원고 한 편이 여전히 노트북 폴더 속에서 미완의 제목으로 남아 있었다. 마음은 그릇과 같아서, 비워낸 빈자리만큼만 새로운 평온이 고일 수 있음을 체감한다. 그래서 오늘, 기록해야 할 문장들과 작가라는 역할을 내려놓고 오직 숨 쉬는 생명체로써의 나만을 남겨두는 작업을 시작했다.

현관문을 닫으며 습관처럼 쥐고 있던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는다. 지퍼를 닫는 순간, 손바닥을 점유하던 매끄러운 고릴라 글라스의 촉감이 사라지고 주변의 풍경이 프레임 속으로 들어온다. 동트기 전의 새벽빛이 아직 얼어붙은 길가에 채 마르지 않은 시간, 편의점의 차가운 LED 조명은 아침 햇살이 비치기 직전 가장 낮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이 도시의 아침은 서울과는 다른 속도로 흐른다. 셔터를 굳게 내린 상가들 사이로 가끔 지나가는 시내버스의 육중한 엔진 소리가 겨울의 정적을 찢어발긴다. 거리에는 쓰레기 수거차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축축한 얼룩과 젖은 아스팔트 특유의 비릿하고 서늘한 냄새가 공기 중에 스며든다.

본격적인 도보를 시작하며 발바닥이 지면에 닿는 압력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최신 고기능성 미드솔의 카본 플레이트가 지면의 충격을 미세하게 튕겨내며 보행의 리듬을 조율한다. 거친 보도블록의 요철은 탄성이 극대화된 폼(Foam)의 질감에 걸러져 부드러운 진동으로 변하고, 횡단보도의 매끄러운 페인트 면은 접지력 높은 아웃솔에 쫀득하게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파편화된 문장들이 차가운 바닥 아래로 흩어진다. 걷는 행위는 목적지를 향한 이동이라기보다, 발바닥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하며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정밀한 빗질에 가깝다. 보도블록 틈새의 척박한 흙을 뚫고 올라온 연약한 잡초 한 포기가 마른 몸을 흔드는 모습을 롱 테이크 샷으로 응시한다. 무엇으로 기록할지 고민하는 대신, 그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대로 바라본다.

백화점 근처의 번화가를 의도적으로 피해 걷는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쇼윈도 안, 화려한 조명 아래 마네킹들이 연말의 소비를 유혹하며 부동의 자세로 서 있다. 거대한 전광판의 픽셀들이 쉴 새 없이 깜빡이며 우리가 무엇을 더 소유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무성영화처럼 속삭일 때, 나는 그 소란으로부터 등을 돌려 수목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대신 습기를 머금은 흙길로 접어드는 순간, 발목과 무릎의 관절이 부드럽게 이완되며 신체의 긴장이 무너져 내린다. 흙을 밟는 투박한 소리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대비되며 마음의 주파수를 낮추는 낮은 저음의 음악이 된다.

수목원 깊숙한 곳, 이끼 낀 소나무 앞에 멈춰 서서 손을 뻗는다. 껍질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오래 글을 써 온 검지 마디의 굳은살이 나무의 거친 질감과 맞닿으며 서서히 온기를 나눈다. 투박하게 갈라진 껍질의 골짜기들이 지문 사이사이에 선명하게 걸린다. 이 껍질들은 나무가 살아온 세월의 수평적 기록이자 스스로를 지켜온 갑옷이다. 갈라진 틈새에서 긴 계절을 건너온 자의 시간을 발견한다. 화려했던 성장의 시간을 지나 잎을 다 떨궈낸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겨울나무의 골격처럼, 내 얼굴과 마음에도 숨길 수 없는 삶의 하구(河口)가 그려져 있었다. 젊은 날의 팽팽한 열정은 잦아들었을지 모르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비바람에 깎이며 단단해진 견고한 중심이다. 껍질의 갈라짐은 상처가 아니라, 내부의 성장을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의 외피를 찢으며 나아간 흔적이다. 나무가 제 몸을 찢어 수액을 흘리고 그 자리에 옹이를 만들듯, 우리의 삶 또한 시련이 지나간 자리에 가장 견고한 무늬를 새긴다.

수목원의 초록이 눈에서 흐릿해질 무렵, 오래된 종이의 쿰쿰한 냄새가 정체된 공기를 뚫고 다가온다. 겨울 한복판, 도시 외곽의 조용한 도서관에 도착했다. 육중한 문을 여는 순간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가 허파 깊숙한 곳까지 시리게 파고든다. 찬바람에 얼어붙었던 코끝이 훈훈한 책 냄새에 녹아내린다. 창가 구석진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종이책 한 권을 꺼낸다. 종이 뭉치가 주는 묵직한 무게감이 손바닥에 내려앉을 때, 비로소 안전한 정박지에 도착했음을 실감한다. 제 앞에는 책 한 권과 몽당해진 연필 한 자루뿐이다. 도서관의 천장은 높고, 그 아래 흐르는 공기는 정박한 배들처럼 고요하게 멈춰 있다.

내가 사라져야 비로소 세계의 윤곽이 드러난다. 문장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욕망과 고집스러운 자아의 소음을 끄지 못하면, 눈앞의 풍경은 언제나 아웃포커싱 된 배경처럼 반쪽짜리로 남는다. 내가 투명한 빈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의 풍경이 온전한 부피로 머물 자리가 생기고, 내 안의 소란이 잦아들어야만 진실한 결이 보이기 시작한다.

연필을 쥐고 메모장 위에 문장을 옮겨 적는다. 서걱, 서걱. 연필 끝이 종이의 섬유질을 긁으며 내는 소리가 손가락 뼈마디를 타고 전해진다. 이 작은 마찰음이 도심의 모든 소란을 압도한다. 연필이 제 몸을 깎아 흑연의 문장을 남기듯, 나 또한 자아를 깎아내어 세상을 담아낼 빈칸을 만든다. 종이 위로 흩어지는 미세한 흑연 가루들은 소나무 껍질에서 보았던 세월의 흔적과 닮아 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넘어 체내의 리듬과 섞인다. 연필 끝이 닳아갈수록 제 안을 채우고 있던 불필요한 단어들도 깎여 나간 연필심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도서관을 나서며 워치의 액정을 탭 한다. 순간, 숨이 멎는다. 화면은 빨간색 느낌표를 띄우며 '비정상적 심박수 상승'과 '심각한 스트레스 상태'를 경고하고 있다. 기계의 알고리즘에 따르면 나는 지금 당장 휴식이 필요한 환자이거나 분노에 휩싸인 폭군이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생애 처음으로 가장 완벽한 고요를 통과하고 있다. 내 안의 리듬은 기계가 읽어내지 못할 만큼 깊고 잔잔한 심해를 유영 중이다. 숫자는 나를 읽지 못했다. 정교한 센서가 감지한 것은 혈류의 속도였을 뿐, 그 혈관을 타고 흐르는 평온의 무게는 아니었다. 모든 연결을 끊어낸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기계가 정의한 '나'를 탈출해, 그 누구도 수치화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로 복구되었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은 여전히 침묵을 지킨다. 굳이 전원을 켜지 않아도 내 안의 리듬이 평온하게 흐르고 있음을 안다. 귓가에는 아직 도서관에서 들었던 연필의 서걱거림이 환청처럼 남아 있다. 그 소리가 내일 다시 무언가를 써 내려갈 마음의 여백을 촘촘히 메워준다. 일정표의 빈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채우기 위한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