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몇 걸음 옆으로 비켜선 자리에서

by 정성균


어제 퇴근하고 저녁을 간단히 먹은 뒤, 늘 걷던 길로 나섰다. 발걸음은 익숙했고, 시선은 굳이 주변을 살피지 않아도 앞을 향해 흘렀다. 이미 알고 있는 길이었다. 발은 어디에 닿을지 미리 알고 있는 듯 움직였고, 시선은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건너뛰었다.


코너를 돌다가 잠시 멈췄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대로 지나가면 될 길 앞에서, 발걸음이 한 박자 늦어졌다. 그냥 지나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그 순간만큼은 익숙함이 조금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깐 서 있다가, 평소에는 들어가지 않던 뒷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입구를 지나 몇 걸음 옮기자 공기가 달라졌다. 바닥은 고르지 않았고,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더 또렷하게 전해졌다. 흙이 눌리는 바스락 거림이 작게 따라왔고,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물기를 머금은 흙냄새와 이제 막 깨어나는 연한 풀 기운이 가까이 올라왔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서늘한 나무 내음이 미묘하게 다른 냄새와 섞여 들어왔다. 익숙한 길에서는 흘려보냈을 소리들이 뒤늦게 귀에 걸렸다. 멀리서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와, 어딘가에서 작은 것이 움직이는 기척이 겹쳐졌다.


조금 더 들어가자 시야가 좁아졌다. 나무들이 가까워졌고, 저녁 그림자는 고르게 내려앉지 않고 군데군데 뭉쳐 있었다.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가며, 걸음은 더 느려졌다. 몸이 먼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바위틈에 기대 선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몸통은 곧게 뻗지 못하고 여러 번 꺾여 옆으로 흘러 있었다. 한 번 꺾인 것이 아니라, 몇 차례 방향을 바꾸며 이어진 형태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것은 제멋대로 뒤틀린 것이 아니었다. 바위를 피해 돌아간 흔적이었고, 바람이 지나간 방향을 따라 굳어진 결과였다. 위로 오르지 못한 자리에 다른 방향들이 남아 있었다. 한쪽으로 밀린 자리에서는 옆으로 뻗었고, 다시 막힌 곳에서는 조금 더 낮은 각도로 방향을 틀었다.


굽은 부분마다 표면이 조금씩 달랐다. 오래된 자리는 거칠었고,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부분은 결이 더 또렷했다. 손을 대지 않아도 시간이 쌓인 방향이 느껴졌다. 나무의 굽은 등 사이로 푸르스름한 어둠이 가늘게 고였다. 완전히 막히지 않은 틈을 따라 남은 온기가 머물다 가며, 바닥에 차분한 정적을 만들고 있었다.


나무는 바위를 밀어내지 않았고,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지도 않았다. 대신 그 사이에서 모양을 바꾸며 자리를 지켜온 듯했다. 비굴함이 아니라 지극한 경배로서의 유연함이었다. 굽어본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낮은 풍경들이 그곳에 있었다.


소나무의 굽은 등 아래, 진달래 몇 그루가 모여 있었다. 낮은 꽃들이 서로 기대듯 붙어 있었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나무가 몸을 비틀어 내어 준 자리로 내려온 저녁의 공기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줄기가 조금 더 곧았다면 닿지 못했을 자리. 그 틈을 타고 스며든 어스름이 꽃잎마다 조용히 얹혀 있었다. 소나무의 휨이 진달래라는 또 다른 생명을 살린 셈이다.


잠시 서 있었다. 방향을 한 번에 정하지 못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 모든 꺾임이 모여 지금의 정교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돌아서는 길에 발걸음이 조금 늦어졌다. 같은 길이었지만 들어올 때와는 다른 느낌이 남아 있었다. 발이 닿는 위치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고, 시선도 조금 더 머물렀다.


그때 주머니 안에서 묵직한 떨림이 전해졌다. 무음으로 해 둔 휴대폰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퇴직한 예전 직장 동료였다. 요즘 산을 자주 오른다고 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말끝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찾아 바쁘게 지내는데, 자신은 그저 산을 다니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잠시 말을 멈췄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오려던 문장들이 있었지만, 그대로 두었다.


대신 물었다. 산에 오를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올라가는 동안은 생각이 단순해지고, 내려올 때는 숨이 차지만 마음은 가벼워진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더 할 말이 없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조금씩 늦춰졌다. 바위를 밀어내지 않고 돌아간 소나무의 방향과, 바람을 스쳐 보내며 굳어진 시간들이 자꾸만 발밑에 차였다.


가끔 걸음을 늦춘다.


어제저녁, 몇 걸음 옆으로 비켜선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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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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