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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홍 Nov 14. 2024

4. 한 달 만에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남편 2

삶은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상급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 남편이 보낸 문자

남편은  상급병원으로 가는 구급차 안에서도 본인의 마지막 행선지를 문자로 전했다. 혹여 본인과 연락이 안 될 경우 걱정할 나를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까지도 그는 "우리 애들이랑 당신은 어때...? 라며 남은 가족들을 걱정했다. 정작 본인이 가장 힘들 텐데 본인으로 인해 힘들 가족걱정부터 하는 마음이 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러나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 그 바람과는 반대로 남편의 건강은 그 후로 최악을 향해 달려만 갔다. 남편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당시 코로나 중환자의 경우도 면회자체가 불가했다. 그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담당 의사에게 오는 전화가 전부였다. 오히려 중환자실에서 남편의 카드로 보호자 대신 사는 기저귀, 물티슈 등 생활 물품들이 남편이 아직 살아 있구나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남편은 중환자실에서도 위중한 급으로 관리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폐 전체가 염증으로 뒤덮여 제기능을 할 수 없었다. 인공으로라도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당장 생명유지가 어려웠다.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목에 구멍을 뚫어 산소를 집어넣는 기관절개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죽음 문턱에서나 한다는 에크모(ECMO)까지 해야 했다. 에크모는 인공폐로 정맥에 긴 관을 꽂아 혈액을 빼내 기계로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고 산소 공급해 준 후 다시 다른 관을 통해 몸으로 투입해 주는 장치이다. 만약 환자가 몸을 뒤척이고 움직이다 잘 못해서 관이 빠지기라도 하면 말 그대로 응급상황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환자실에서도 최고 중증으로 관리되었다. 남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계속 마취한 상태가 이어졌고  팔다리는 침대에 묶여 있었다. 희망적인 정보를 찾으려 인터넷을 검색했지만 ‘에크모를 했던 사람은 살아 돌아가는 경우가 드물고 운 좋아 살게 되더라도 본인의 발로 병원을 걸어 나가는 사람이 없다 ‘는 내용이 거의 전부인 정보들 뿐이었다.

의식 없이 도착한 상급병원에서 걸러온 전화에서도 초반엔  젊은 환자니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회복할 거라는 의사의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점점 나빠지는 남편의 상태로  인해 그 확신도 빛이 바래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렇게 아프고 힘들었는데, 그렇게 남편도 떠나버리는 건 아닌지에 대한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과거에 그러한 일을 겪어봤다고 이번엔 덜하겠지라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에는 대비할 수 없었다. 인간의 감정도 학습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20살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건 언젠가 이 감정도 끝이 있고 그 후에는 어떻게든 이 슬픔을 견뎌낼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건 학습이 되어있었다. 20살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온전히 빠져 그 순간의 나의 감정을 모두 쏟아냈으나 40살의 나는 나에게 부여된 엄마라는 역할이 나를 억지로 일상으로 복귀시켰다. 사람마다 진 삶의 무게는 때로는 각자를 더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어렵다. 저마다의 인생스토리를 만들어준 사연들이 우리가 어렸을 적 배웠던 권선징악, 인과응보 따위의 개념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부정도 해보고 그 누군가를 원망도 해보지만 결국 남는 건 인생스토리의 주인공이 스스로 생각해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분노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원망은 어느 정도 내공을 가져야 멈출 수 있을까. 어떤 시인은 이 세상을 소풍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현자는 찰나(刹那)라고 표현했다. 이 정도의 초연함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인생 4회 차정도 살아야 그런 내공은 생기는 걸까.


To be continued.


p.s 아래 그림은 절규로 잘 알려진 뭉크가 1918년 전 세계를 휩쓸고 숱한 사망자를 냈던 스페인독감 바이러스를 끝내 이겨내고 본인 자화상을 그렸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뭉크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여든 살 넘게 살았고,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고 또 그렸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병약했던 뭉크는 어머니가 뭉크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로 인해 아버지는 우울증 증상을 보였습니다. 누나 역시 폐결핵으로 뭉크가 열다섯 살이 됐을 때 사망했고, 남동생 안드레아스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급성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어 여동생은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뭉크는 이런 불행한 가족사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평생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어떻게 고통과 불안을 어떻게 그림으로 승화했을까? 본인의 아프고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뭉크의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았듯이요. 저도 언젠가 뭉크처럼 삶에서 마주하는 아픈 기억들을 승화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나의 고통은 나 자신과 나의 예술의 일부다. 그것은 나와 불가분의 관계이고 그 고통을 없앤다면 나의 예술 또한 파괴될 것이다. 나는 그 고통들을 간직하고 싶다.' -에드바르 뭉크-


스페인독감후의 자화상 Self-portrait after the Spanish Flu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소장 노르웨이 국립 박물관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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