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달아준 독수리의 감사함을 잊지 마라
LA에 도착하자마자 A와 재회했다. 신혼집에서 보내는 날들은 꿈같이 행복했고, 낯설 줄 알았던 공간도 금세 익숙해졌다.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았을 때, 한국의 가족들에게 캐나다 영주권을 포기하고, 이젠 결혼식 준비를 하려 한다는 고백을 했다. 솔비 씨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덤덤하게 질문을 하며, 상황을 파악했고, 내 결정을 받아들였다. 미국에 도착한 지 3개월 만에 결혼식 날짜를 잡았고,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결혼식 날까지 계산해 보니 겨우 7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너무 빠르다고 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 조언은 귀에 들리지도 않고 엘에이 새 댁으로써의 행복한 단꿈만 꾸었더랬다.
결혼 전, A는 나를 친구들에게 소개하려 여러 모임에 데려갔다. 술도 잘 마시고 친구들과 웃고 즐기며 기분 좋게 술자리를 시작했지만, A는 어떤 모임이 됐던, 끝날 때마다 인사불성이 되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거리에서 그를 부축해 택시를 타고, 어디가 어디 인지도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다 집에 도착하곤 했다. 만취 상태인 그를 깨워서 집에 들어갈 때, 그가 가끔 나를 못 알아보고 나와 택시 기사, 이웃 주민에게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술에 취해 그런 행동을 했을 거라고, 결혼준비에 예민해서 그럴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그를 이해하려 했었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A는 집에 들어오면 나를 붙잡고 다시 술자리를 시작하고, 같은 이야기를 끝없이 반복했는데, 내가 몇 번이고 대화를 끝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듣다 듣다 내가 피곤하다고 하면, 그는 술 취한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어떻게 사회복지사로 일을 했던 거냐며, 나를 몰아세웠다. 술자리를 끝내려 자리를 뜨면, 곧장 따라와 10분만 더 이야기하자며 나를 끌고 나왔다. 식탁에 다시 앉혀진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어야 했고, 아침이 다 될 무렵, 그가 졸려서 꼬꾸라 질 때까지 앉아 있은 후에야 그 술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좀 지나면 좋아지겠거니 생각하며 참았고, 그를 내 잣대에 올려놓고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때는 그 주사가 그의 본모습의 100분의 1도 못 본 것 임을 알지 못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A와 결혼 준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A는 점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던 사업가의 모습도, 커피 한 잔 사주는 것 외에는 지갑을 넣어 두라던 그 사람은 사라지고, 내 눈앞에 전혀 다른, 찌질이가 와 있었다.
"네가 입을 웨딩드레스, 네 가족들이 와서 잘 곳, 먹을 것, 여행 일정까지 전부 네가 알아서 해."
"아... 알았는데, 솔비 씨가 오면 돈을 줄 건데, 지금은 내가 돈이 없으니 당신이 선금만 좀 내주면 안 되겠어?"
A는 내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했고, 좋을 때는 한국식, 불리할 때는 미국식을 내세우며 태도를 시시 때 때로 바꿨댔다. 웨딩드레스, 메이크업, 이브닝드레스, 부케… 준비해야 할 것들은 쏟아지는데, 돈이 없었다. 솔비 씨는 그때 당시, A가 한국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을 보지 못한 사위라는 사람한테 송금할 수 없다며 돈을 보내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물론, 내 상황은 힘들었지만 맞는 말이기에, 내색하지 못했고 솔비 씨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렇지만, 상황이 말이 안 되게 힘들었던 건 피할 수 없던 현실이었다. 그리고 나도 털어놓을 곳이 필요해서, 내 평생의 쏘울메이트이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던 대학 선배, 운이 오빠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오빠는 내 푸념을 몇 날 며칠을 들어주다 갑자기 어떤 연유로 결정을 했는지,
"한 달 동안 휴가 내고, 네 결혼식 도와줄게."
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 여기가 어디라고, 오빠가 미국까지 날아왔다. 운이 오빠가 도착한 그날부터 오빠는 신부 들러리가 아니라, 노동자가 되었다. 부케를 만들고, 이브닝드레스를 사서 바느질로 리폼하고, 웨딩에 필요한 물건들이 가장 저렴하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웨딩드레스는 대여비가 너무 비싸 A의 친척에게 빌렸지만, 내 뜻대로 살이 빠지지 않아 결국 몸에 맞지 않는 작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치렀다. 만. 약. 에. 운이 오빠가 없었다면 내 결혼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다.
내 결혼식을 하나부터 열까지 같이 준비하던 오빠였지만, 손님 대접을 받은것은 아주 잠깐이었고,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A의 술주정을 들어야 했다. 하루는 내가 지쳐서 먼저 잠이 들었는데도, A는 아랑곳하지 않고 운이 오빠를 붙잡고 몇시간 동안 더 주정을 부렸다고 한다. 그 날 아침, 밤 새 잠을 못자고 고민하던 운이 오빠가 6시에 나를 깨우더니, A가 잠에서 깨기 전에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커피숍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았다. 담배를 말없이 피운 오빠가 나를 측은 하게 바라보며 내 손을 잡더니 말했다.
“이것아, 그러지 말고 집에 가자.”
참았던 눈물을 터져 나왔다. 그동안 괜찮은 척 했기 때문에, 오빠가 모를거라 생각했지만, 가까이에서 내 어려움을 짐작하지 못할 오빠가 아니였다. 오빠와 긴 시간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로 하고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과 캐나다에서 온 가족, 친척, 친구들을 모시고, 결혼식을 잘 치뤘다. 일주일 남짓 모두 함께 시간을 보냈고, 우루루 한국으로, 캐나다로 돌아갔다. 가족과 친구들이 떠나고 헛헛 했던 모든 순간 마저 함께 해준 후,제일 마지막으로 오빠가 떠나야 하는 날이 왔다. 오빠를 공항에 데려다주기 위해 차에 올랐고, 우리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출국장 앞에서 오빠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너를 놓고 가려니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
오빠와 나는 마치 내 결혼의 결말을 미리 아는 것처럼 부둥켜 앉고 엉엉 울었다. 그렇게 내 편이었던 오빠가 떠났다.
미국에서 살아보면 신분 해결이라는 말이 결코 낯설지 않다. 합법적인 체류 비자를 얻기가 어려운 이곳에서는, 신분을 해결하기 위해 불법 체류자가 시민권자와의 결혼을 빌미로 상대의 마음을 악용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시민권자가 비자를 미끼로 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캐나다 영주권을 포기하고 미국에 온 나에게, 그저 이야기로만 들었던 신분 갑질이 내 현실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A와 다툴 때, '네가 한국으로 쫓겨나봐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아서, 니 영주권을 취소해야 할거 같다. 나라를 잘 타고 태어난 게 가장 큰 복, 그다음이 부모를 잘 타고 태어난 것인데 넌 나 때문에 복 받았다. 내가 달아준 독수리의 감사함을 잊지 마라 (미국 여권의 상징).'등등 영주권 취소 폭언을 일삼으며 날 공격 했다.
그리고 영주권을 기다리며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던 나를 편하게 해주기는 커녕,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노동비자가 없으면 길에 나가 양말이라도 팔아라. 그건 경찰도 봐줄 거다."
“미국에선 너 같이 돈 안 되는 일 하는 사람이 제일 바보라서 뭘 해도 사회복지사보단 낫다"
"한 달에 슈퍼 두 번 가는 거 자주 가는 건데, 네 돈이면 그렇게 썼겠냐"
"너네 집 잘 사는 거 같은데 집에 말해서 돈 좀 가져와라. 결혼 영주권 요즘 시세가 5천만 원이라더라"
날이 갈수록, 그의 말은 폭언이 되고, 그의 태도는 갑질이 되었다. 처음엔 무조건 이해해보려 했고, 말에 꽂히지 않으며 노력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던 그의 행동에 더 이상 결혼에 대한 기대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고, 결국 그 자리를 상실감과 절망이 채우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우울이라는 놈이 나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얼마큼 울었다고 말해야 그때의 절망감이 전해질까?, 내가 어쩌다 이 큰 땅에 왔는지, 영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하며 울던 밤들, 수많은 질문을 천장에 던지던 밤들, 술 먹고 들어 온 남편이란 사람을 피해 자는 척을 하고, 들킬까 무서워 방에 숨겨놨던 차가워진 밥을 소리 없이 삼키던 밤들, 아침에 떠진 눈이 원망스러워서 울던 날 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무기력함이 온몸을 짓누르며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살이 헐어 이제 풀지도 못하는 코를 흘리며 닫힌 문을 바라보았었다. 열면 큰일이 날 거 같던 그 방 문. 그 하얀 문을 열지 못해 망설였던 나. 그 방문 뒤에 있던 두려운 존재에 의해, 일어설 틈도, 반항할 기회도 없이, 그렇게 나라는 사람이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