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가 캐나다에 영원히 살 줄 알았을까?
밴쿠버의 Capilano University에서 관광경영학을 공부하며 보육교사 일을 병행했던 2년은 내게 큰 성장과 배움의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프로젝트를 마치기 위해 각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밤을 지새우며 협력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각 나라의 관광 산업을 소개하는 수업을 통해 문화 차이를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모든 과정을 해내기에 부족했던 영어 실력은 친구들에게 떡볶이와 불고기를 요리해서 나르는 걸로 커버하며, 본의 아니게 한식의 위대함을 전파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친구들과 밴쿠버의 관광명소를 돌아 다니고 의견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영어 실력이 향상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모든 과정을 낙제 없이 마무리하며 졸업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의 내 생활을 색깔로 비유하자면 핑크빛이었고, 지금부터 회색빛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졸업 후, 캐나다에서 제공하는 졸업생 혜택인 3년짜리 노동비자(Working Permit)를 신청했다.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비자였기에, 신청 과정에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 믿었고, 작은 실수가 시간 낭비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밴쿠버에서 가장 크고 신뢰받는다는 유학원에 비자 서류 작성 대행을 의뢰했다. 전문가에게 맡기면 안전하리라 믿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며 안심하고 맡겼다. 그러나 비자가 발급된 이후, 큰 충격에 빠졌다. 3년짜리 노동비자가 나왔어야 하는데, 내게 주어진 비자는
1년 11개월 후가 만기인 비자였다. 이유를 알아보니, 유학원이 내 여권의 만료일을 확인하지 않아 여권 만료일에 맞춰 노동비자 기간이 조정된 것이었다. 유학원에 항의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과는커녕, 오히려 1년 9개월이면 충분히 일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당연한 듯 말하고, 원하면 일을 구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비싼 돈을 받아 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그들의 태도에 실망감과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실수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고, 풀타임 직업을 구하고, 회사로부터 영주권 서류를 지원받는 작업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불안감속에서, 어떻게든 영주권을 취득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고민하던 중, 문득 내가 근무했던 SAT 학원의 원장님께서 영주권 스폰서를 제공할 의향이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원장님께 연락해 영주권 스폰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 원장님은 흔쾌히 풀타임 근무를 수락하셨고 적극적으로 비자 취득을 돕겠다고 하셨다. 절망했던 나머지 다른 생각은 할 여유도 없이 그저 기뻤다. 하지만 학원의 형편이 좋지 않아 기본급에 인텐시브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월급을 줄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예상되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주권 취득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 나는 투 잡을 병행 하며 생활비를 충당하기로 결심했다. 말이 안 되는 근무조건이었지만 그마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원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주공사( 이민회사)와 영주권 신청을 시작했다. 신청 후 이주공사에 요청에 따른 서류를 준비해야 했는데, 캐나다에서 외국인이 영주권을 받으려면 고용주의 적극적인 지원과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물론, 원장님이 흔쾌히 영주권 스폰을 도와주시기로 하셨지만, 원장님이 제출해야 할 서류들과, 단계가 단순하지 않았다.
1단계. 고용주는 캐네디언에게 우선 기회를 주기 위해 3개월 동안 구인 광고를 내야 했고, 그 기간 동안 적합한 캐네디언 직원이 없었고, 때마침 조건에 맞는 외국인 직원이 이력서를 내었다는 증빙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그 과정을 위해서 원장님은 구인 사이트에 광고를 올리고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증빙서류를 만들 수 있었다.
2단계. 학원은 외국인 직원을 고용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는지를 심사받아야 했다. 원장님이 업계에서 20년간 일하신 경험 덕분에 서류 준비에 대해 잘 알고 계셨고, 필요한 자료를 성실히 제출해 주셨다.
나를 위해 이 모든 과정을 진행해 주시는 원장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어, 학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비 오는 날에도 거리에 나가 학원 전단지를 돌리고, 원장님께 허락을 받아 새로운 반을 개설해 학생 유치를 위해 노력했다. 학생이 모집되면 바로 선생님을 구해서 새로운 교실을 신설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아침부터 밤까지 고군분투하며 학원생 유치에 힘썼고, 학원의 수익을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루하루가 쉴 틈 없이 바쁘게 지나갔지만, 나는 그 속에서 감사와 보람을 느꼈다.
6개월이 지났을 즈음 2단계 결과가 나왔다. 9개월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받은 우편에는 ‘부적합’이라는 단어가 적힌 문서가 들어있었다. 1년 이상 비즈니스를 운영한 사업체만이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다는 규정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학원이 사업자와 상호를 변경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고용 조건이 부적합하다는 통보였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원장님이 이 문제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숨겼다는 것이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분노하는 시간조차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이미 유학원의 실수로 노동비자가 1년 11개월로 단축된 상황에서, 학원 원장으로 인해 9개월이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남은 시간은 1년 남짓. 남에게 내 미래를 맡긴 거 같아 한없이 나를 탓하고 가슴을 내려쳐도 여전히 내가 처한 현실은 가혹했다. 3년짜리 노동비자를 얻기 위해 거액을 투자하며 2년간 학업에 매진했다. 그 노력 끝에 마침내 꿈에 다가섰다고 믿었는데, 너무도 어이없게 그 기회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상담을 받아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이민 회사, 유학원, 영어 학원들이 서로 얽혀 있는 한인 사회에서는 진정한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비즈니스는 커미션으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고, 내 문제는 그들에게 강 건너 불구경에 불과했다. 아니, 그들에게 나는 귀찮고 불편한 존재였다. 정말 단 한 명도, 진정으로 내 얘기를 들거주 거나 나를 돕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길은 반드시 있다고 믿기로 했다. 그 후 새로운 영주권 스폰서를 찾고, 1년 안에 경력을 쌓아 영주권을 신청해야 된다는 선택지 하나만 남기고 모든 옵션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눈물을 흘릴 시간도 아까웠고 시간을 허비할 여유조차 없었다.
고민 끝에, 나의 성실함을 알고 있는 유치원 원장님께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원장님과 약속을 잡고, 유치원에 도착하여, 원장님과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따뜻이 맞아주며 다 이해한다는 듯이 나를 봐주는 눈길을 마주하자,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원장님은 영문도 모른 채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내 손을 잡아주셨다. 한참을 울고 나니, 정신이 차려졌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했다.
원장님은 내 모든 이야기를 들으신 후, 영주권 스폰은 신중히 결정해야 할 문제라며 시간을 갖고 고민해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이후 기다림의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열흘쯤 지난 후, 원장님께서 영주권 스폰을 해주시겠다는 연락을 주셨다. 그 순간, 마치 든든한 울타리를 얻은 것 같았고, 이제부터는 열심히만 하면 모든 고생이 끝날 것 같았다. 급한 내 상황을 이해해 주신 원장님 덕분에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동료 선생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이주 공사를 통해 영주권 신청을 준비하게 되었다. 비싼 비용이 부담스러웠지만, 일을 잘한다고 알려진 곳이라 믿음을 갖고 진행했다. 이제는 한숨 돌릴 수 있을 거라는 작은 안도감이 밀려왔고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이주공사에서 서류 작성 후, 접수를 한다는 통보를 받으면, 이번에는 예전처럼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모든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검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서류 준비과정에서 또 한 번의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주공사가 작성한 서류에 내 영문 이름과 생년월일이 틀린 채로 접수되려 했던 것이다. 그 채로 우편이 발송 됐다면 내 서류가 접수되지 않은채로 또 허송세월을 보냈을거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서둘러 이주공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자, 돌아온 대답은 황당했다. “돈을 돌려드릴까요? “라는 말과 함께 “우리에게는 고객이 많다”는 으름장이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니고, 시간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결국 화를 삼키며 서류를 정정해 다시 제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긴 기다림과 반복된 실망 끝에, 드디어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1단계 구인 광고 서류 증빙이 합격되었고, 2단계 외국인 직원 고용 적합 여부 심사도 통과되었다. 이제는 1년간의 경력을 쌓아 제출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한숨 돌릴 수 있을 상황이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실패와 배신을 겪은 탓에, 영주권을 손에 쥘 때까지 안심할 수 없었고 몇 번씩 비슷한 상황에 처하고 나니, 캐나다에서의 행복한 삶은 이미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했다. 나도 모르게 내 삶은 영주권 외에는 소중한 게 없는 듯이 집착하고 있었다. 소소한 행복을 누리던 일상은 점점 사라졌고, 결과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이어졌다. 매일 애꿎은 우편함을 들여다보며, 영주권이란 이름의 구원 편지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는 나의 젊음과 시간을 영주권이라는 문서와 맞바꾸고 있다는 것도, 목표가 인생의 전부가 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6년이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왜 내가 캐나다에 영원히 살 거라고 생각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