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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라면 6개월간 3번의 이사도 참을 수 있다.

수박 겉핥기. 그때가 좋았다.

by HaDa Jan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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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밴쿠버 어학연수 계획은 완벽해 보였다. 12월에 밴쿠버에 도착해 두 달간 어학원(ESL)에서 공부하고, 3월부터 5월까지 테솔(TESOL) 자격증을 딴 뒤 6월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검색하고 치밀하게 계획한 결과, 집 계약도 순조롭게 마쳤고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끊이지 않았다.


어학연수 기간만 놓고 봐도, 나는 무려 세 번이나 집을 옮겨야 했다. 첫 번째 집은 다른 학생과 함께 방을 렌트한 곳이었다. 집주인은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그는 나에게만 유난히 호의적이었다. 매번 내 밥만 차려놓고는 다른 학생은 식탁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처음에는 그 호의가 고맙기도 했지만, 점차 불편함이 커져서 두 번째 집을 알아보게 되었다.


두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집주인 언니는 나보다 네 살 많은 싱글 여성으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성격이 참 좋았다. 집주인 언니의 친구인 피아노 선생님, 수 언니도 마침 집 계약 문제로 일주일 정도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참고로, 수 언니는 내 앞으로의 여정에 빠질 수 없는 핵심인물이다.) 두 언니들은 차가 없던 나를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고, 맛있는 밥도 해 주며 따뜻하고 감사한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수 언니가 이사를 나간 다음 날 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집주인 언니의 “남편”이라는 사람이 집에 찾아온 것이다. 언니는 나를 불러놓고 사실혼 관계였지만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져 집을 몰래 얻어 도망쳤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남편이 찾아와 잘못을 빌며 다시 함께 살자고 부탁했다고 했다. 언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나는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했다.


며칠 뒤,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의 격렬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지만, 곧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언니의 “하지 마, 하지 마! “라는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 밖으로 나가는 게 너무 무서웠던 나는 급히 수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 언니는 침착했다. 수 언니는 그 남편이 원래 가정폭력을 일삼는 위험한 사람이라며 “경찰에 신고해야 할 일”이라 단언했다. 그리고 나에게 “아무것도 하려 하지 말고 바로 집 밖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잠시 후, 수 언니가 집 앞에 도착했고, 곧 경찰이 왔다. 그런데 경찰이 언니의 남편을 체포하지 않고 돌아갔고, 나와 집주인 언니는 옷가지를 챙겨 수 언니 집으로 피신 해야했다. 그리고 며칠 뒤 수언니의 도움을 받아 세 번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어학연수 기간 동안 집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정신을 부여잡고 학원은 열심히 다녔다. 솔직히 말하자면, 원어민 선생님의 영어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또 영어 이름은 왜 그리 쉬운 걸로 지었는지. 선생님은 맨날 내 이름 ‘써니’만 불러댔다. 대답은 못하기 일쑤, 같은 반 한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팀 발표는 어찌어찌, 방과 후에는 수 언니가 숙제를 도와주었다. 그 덕분에 간신히 수업을 따라갈 수는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테솔 과정은 내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도전이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버틴 덕분 테솔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가 폭발적으로 늘지는 않았기 때문에 외국인 친구들이 부르면 무조건 나가서 스피킹 연습을 했다.


어느 날은 친구가 중국인 친구 생일 파티가 있다며 같이 가자고 해서 흔쾌히 따라나섰다. 생일 주인공은 나보다 일곱 살 많았고, 이름은 좐이었다. 좐은 어색하게 앉아 있던 나에게 계속 말을 걸어줬다. 매너도 좋았고, 웃을 때마다 살짝 보이는 보조개는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버벅대며 쏟아내는 내 이상한 영어도 인내심 있게 들어주고, 심지어 재밌다며 호응까지 해줬다. ‘이 사람, 괜찮은데?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내 하찮았던 영어 실력 때문에 우리의 만남은 그날이 마지막 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뒤, 좐이 친구를 통해 데이트를 신청해 왔다.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두 번째 만났고, 세 번째 만남에서 좐은 수줍은 얼굴로 내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의 말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설렜지만 정신을 부여잡고 미안하지만 나는 곧 두 달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곧 결단력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으로 따라갈게요.”

좐의 믿음직한 한마디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예쁜 커플이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가지가지 열두 가지를 함께 했다.


즐거운 시간은 유난히 빠르게 흘러간다더니, 어느덧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떠날 준비를 해야했지만, 밴쿠버에서의 삶에 푹 빠져 있던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계획대로 안정된 삶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밴쿠버에 더 머물며 행복한 시간을 이어갈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정의 갈림길에서 나의 조력자인 울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복잡한 속내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듣던 언니는 잠시 침묵하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각오로 밴쿠버에 계속 있겠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나이도 나이인 만큼 쉽게 결정하는 건 아닌 거 같아. 이런 말 좀 그런데, 이번에는 생각 없이 결정하지 말고 제대로 보여줘. 유학이던 이민이던 하려면 제대로 된 방법으로 해. 중국에 10년 살고 느낀 점은 남의 나라에서 버티려면 정석으로 가야 한다는 거야. 뭐가 됐던 이번엔 제대로 된 결정이 여야해. “


언니와 전화를 끊고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도대체 뭘 제대로 보여줘야 하는 건지, 영어도 못하는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원하는게 유학인지 이민 인지도 확실하지가 않고 혼란스러웠다. ‘그래! 밴쿠버에서 계속 살게 됐을 때의 장, 단점이라도 좀 써보자.‘ 글로 쓰면서 내 마음의 소리에 집중 하니, 내가 원하는게 보였다. 영화처럼 아름다운 밴쿠버에서 질릴 때까지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과 새로 사귄 사람들과의 인연을 놓아버리기 싫다는 생각. 그래!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은 아직 아니라고, 그리고는 내 안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민? 까짓것 해보지 뭐. 왜 안 돼?! “

기동력이 가장 큰 장점인 나는, 바로 다음날 이민 계획 세우기 위해 유학원과 이민전문 회사에 컨설팅을 의뢰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그때까지가 딱 좋았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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