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 라파예트에 ‘셀러리 보그 자연보호구역(Celery Bog Nature Area)’이라는 인공습지가 있다. 본래 자연습지였는데 화재로 숲이 소실되고 습지도 말라 황폐해졌다가 인위적인 노력으로 다시 습지로 복원된 곳이다. 언제 그런 화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습지에는 다양한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습지를 둘러싼 숲은 싱그럽다.
작년 5월, 언니가 살고 있는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 라파예트에 가족들과 함께 방문했다. 박사과정을 준비하는 언니는 2년에 한번씩 한국에 들어와 한달정도 체류하다 갔지만 우리 가족이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여행에는 엄마와 이모, 동생네까지 3주간을 체류하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피로도를 줄이기 위해 매번 대가족이 다 같이 움직이기 보다는 그때그때 원하는 곳을 소그룹으로 다니곤 했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국제운전면허증도 발급받았다.
어느 날, 언니의 권유로 엄마와 이모,두 딸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 나무가 우거진 숲 속 산책로를 걷다 보면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숲 어딘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려온다. 중간 중간 습지로 난 작은 길들이 이어지고 그 길을 따라가면 다양한 각도에서 습지를 볼 수 있다. 습지에는 새들이 쓰러진 나무의 솟아오른 가지 위에 고고한 자태로 서있거나 거북이가 몸을 말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자연보호구역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인공 분수나 가로등과 같은 우리나라의 산책로라면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구조물들은 아무것도 없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앞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벤치 하나가 보인다. 처음 만나는 인위적인 구조물이다. 하지만 벤치에 앉는 순간, 등받이에 쓰인 작은 글귀를 보고서, ‘아! 이 벤치는 구조물이 아니구나. 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에 이른다. 나는 지금은 더 이상 이곳에 없는 사람을 만난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볼 수 없는 사람을 본 것이다. 여러 갈래로 뻗은 숲 둘레길에는 어디든 이런 벤치가 있었고 벤치마다 이름이 있다. 이렇게 말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소년, 닉 세비그니와의 사랑스러운 추억을 담아
-우리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존 뉴먼을 추억하며(1932~2021)
그분은 이곳을 걷는 것을 사랑하셨어요.
-이 보드 워크(짧은 산책 데크)는 제프리 데이비드 문과의 추억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1979~2010)
제프는 셀러리 보그 자연보호구역을 걷는 걸 사랑했습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 보드 워크와 벤치가 미래의 세대에게 기쁨을 주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마주칠 수 없는 닉 세비그니, 존 뉴먼, 제프리 데이비드 문을 마주쳤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내가 사랑하는 산책로가 있듯이 그들이 살았던 이곳에 그들이 사랑하는 산책로에서 말이다. 내가 만일 이곳에 살았다면 나도 이 산책로를 사랑했을 것이며 어쩌면 내 가족들이 나를 기억하기 위한 벤치를 만들 수도 있겠지. 나는 아름다운 애도의 구조물이 그 무엇도 아닌 벤치라서 좋았다. 모두에게 ‘쉼’을 선물하는 벤치라서 좋았다. 마침표가 주는 쉼표의 미학. 아름다운 애도의 방법, 벤치.
내 옆에 앉은 어린 딸을 본다. 그 위에 한 소년이 오버랩 된다. 가늘고 투명한 밤색 곱슬머리가 보드랍게 헝클어져 있다. 나는 손가락빗으로 곱슬머리를 쓸어내린다. 탱글탱글한 머리칼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지럽힌다. 아이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이마와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손가락 빗질을 멈추고 땀을 닦아준다. 축축한 생명의 기운이 착착 달라붙는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나를 어루만질 때 내 마음속 뜨거운 것이 울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