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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치 Nov 06. 2024

김이듬, 『표류하는 흑발』,『투명한 것과 없는 것』비평

이상한 세계, 이상하지 않은 세계

김이듬, 『표류하는 흑발』(민음사, 2017),

『투명한 것과 없는 것』(문학동네시인선, 2023)


이선민


김이듬이 제시하는 세계는 이상한 세계다. 시인은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의 시인의 말에서부터 신인의 수상 소감을 듣고 “나만 이상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와 함께인 것은 이상한 일인가? 그렇다면 시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인가? 나는 김이듬의 『표류하는 흑발』을 읽고 비로소 시가 좋아졌으며, 해당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본능적으로」와 「파견지에서」를 읽고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김이듬이 시 쓰는 일을 ‘이상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인가? 그런데 시인은 2021년도 여성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인이라면 좀 이상한 사람, 혹은 특별한 사람,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곤 하는데 나는 사실 시를 쓸 때나 시인이지 책방에서 책 처방하고 책 팔고 할 때는 책방 언니다. 그게 되게 편하다.” 그렇다면 사람이 시인으로서 기능할 때에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걸까? 다시 김이듬은 핀치의 인터뷰어가 시를 쓸 때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에 “저는 철학이 없어요. 그냥 나는 이거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시를 써요.” 하고 답했다. 이상한 일이다. 어떤 것을 맹목적으로 행하게 만드는 것을 손에 쥐고 사는 기분은, 아무나 경험할 수 없음에서 피어오르는 이상함이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기분이 무엇인지 이해해 보며 김이듬이 독자에게 제시하는 ‘이상한 세계’라는 것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표류하는 흑발』(민음사, 2017),『투명한 것과 없는 것』(문학동네, 2023)을 대상으로 하며 이하 시의 제목만 밝힌다.


「저녁의 모방」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범죄라고 말하는 이곳은 그것 수행자들로 넘쳐난다.”


‘그것’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독자에게 ‘그것’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해당 시를 ‘쓰기’라는 행위에 접목을 시켜 ‘그것’이라는 지시대명사를 ‘문학’으로 치환해 보았다. 단어를 바꾸어 놓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문학을 하지 않으면 범죄라고 말하는 이곳은 문학 수행자들로 넘쳐난다.”


영상 컨텐츠가 부흥함에 따라 텍스트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책을 읽지 않으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이듬이 제시한 세계는 실재하는 세계와는 다르다. 문학을 수행해야만 “식량도 팔고 드레스랑 턱시도도 팔고 무기도 팔고 공장과 병원 국가도 돌아”간다. 더할 나위 없이 무언가를 쓰고 생산하고 싶은 세계로 존재한다. 문학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너는 부끄럽지도 않니? 그것을 전혀 가지지 않고도 살다니” 하고 말한다. 모두가 문학을 사랑하고 행하는 세계. 그런 세계 속에서만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확인해 보고 싶지도 않다”고 말한다. 문학을 저버린, “그것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을 말이다. 또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이는 그것을 탐구했고 어떤 이는 그것을 신성시했으며 어떤 이는 그것을 과장”하고 있다. 김이듬은 이러한 세계를 ‘이상한’ 세계라고 규정하는 것일까? 해당 시에 따르면 “현실은 비현실적으로 기상천외한 법”이므로 현실이 시인의 세계를 ‘이상한’ 세계로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들이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비현실적으로” 기능함으로 ‘그것’을 따르는 것들을 전부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을 따르는 것들은 현실 세계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표류하는 흑발』에 수록된 「공중뿌리」의 화자는 자아의 분리와 재구성을 겪고 있다.(“내가 끝나고 내가 시작되거나 내게 가까울수록 내가 아닌 건 마찬가지”) “집을 찾아 헤매곤”(「젖은 책」) 하지만 존재 자체가 지워진 것은 아니다. 자아의 재구성을 통하여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이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복면을 쓰고」)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의 화자는 자꾸만 희미해진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자신이 설 자리가 도통 알 수 없는 것처럼 진술한다. 특히 「법원에서」의 화자는 “나는 나를 떠나버린 것 같다”고 진술하며,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화자 또한 “나는 있었지만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분명히 존재했던 화자가 어디로 간 것일까? 분리와 재구성을 반복 속에서 존재 자체를 잃어버린 것일까? 이러한 진술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김이듬의 화자는 실존의 감각을 놓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실존의 감각을 놓쳐버렸나?


“해변으로 떠내려온 나체가 있다/익사체를 구경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진짜 같아// 누가 사람인가// 단골 술집에서 나온 사람이 눈밭에 쓰러진 사람을 보았다/이 세상에 믿을 게 없어요/이것은 노래인가 아우성인가// 지하철 알루미늄의자에 앉아 그는 외국에서 올 여자를 상상한다/무료배송으로 도착할 진짜 여자의 촉감을 기대한다/인터넷 쇼핑몰 뒤져 걸스카우트 유니폼을 고르고 있다/말을 하는 여자는 피곤해// 지난번 여자는 해변에 데려가서/여섯 개의 조각으로 손쉽게 버렸다/분리수거 봉짓값을 벌었다”


김이듬이 구축한 ‘이상한’ 세계에는 현실에서 실존의 감각을 잃어버린 것들이 발을 딛고 있다. 그들은 현실에서 탈각되어 그 세계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중 돋보이는 것은 현실에서 ‘가짜’로 취급당하는 여자들이다. 「리얼리티」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 질문은 바로 ‘진짜 여자’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다. 해당 시를 읽고 불현듯 친구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그 친구는 최근 첫 발령을 받아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발령 전,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초등학교에서 8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아이의 부모에게 “진짜 선생님도 아니지 않느냐”는 컴플레인을 듣고 맥이 풀렸다고 했다. 화도 나지 않고, 미운 마음도 들지 않는데 다만 분하다고 했다. ‘진짜 선생님’과 ‘가짜 선생님’ 사이에서 친구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가짜 선생님’들이 ‘진짜 선생님’ 대우를 받을 방법을 말이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가짜 선생님’은 무엇이고 ‘진짜 선생님’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그것이 분하다고 말했다. 인용으로 제시한 「리얼리티」 또한 그렇다. “누가 사람인가” 하고 묻는 화자는 “진짜 여자”와 리얼돌 사이에서 ‘진짜’라는 것은 무엇인지 혼동한다. 이토록 쉽게 지워지고 투명해지는 여성 화자는 “나는 인간의 끝에 겨우 붙어 있다”(「주말의 조건」)고 말한다. 시의 공포는 “진짜 여자”를 판가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같은 문제를 카테고리만 바꿔 반복하는 현실 세계처럼 「리얼리티」는 우로보로스의 형태를 띄고 있다. 첫 연에서 마지막 연으로, 마지막 연에서 첫 연으로 다시 순환하는 것은 큰 공포로 다가온다. “지난 번 여자”는 “진짜 여자”인지 “가짜 여자”인지 알 수도 없다. “정말 진짜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과 “이 세상에 믿을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다른가. 독자들은 어떤 것이 ‘진짜’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으며 시 속의 발화자들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시 안에는 ‘진짜 사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황폐한 순환 속에서 발생하는 무기력함과 한탄은 화자의 선명도를 낮추어 그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앗아간다.


시인은 “테러리스트와 시인은 절망으로 만들어진다”(「시월」)고 말한다. 현실에서 탈각된 존재들이 ‘이상한’ 세계에서조차 현실의 공포를 마주한다. 절망으로 응축된 마음이 시적 언어로 바뀔 때 그것은 마찬가지로 절망적인 형태를 띄는가, 반대로 희망적인 형태를 띄는가.


김이듬은 이상한 세계에서 현실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시 이상한 세계로 돌아온다. 그 과정 속에서 김이듬의 화자는 점점 투명해진다. “매일매일이 잠시의 소강상태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시인이 제시하는 세계가 이상한 세계라면 현실은 이상하지 않은 세계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 세계에서 일정 이상의 타격을 받은 것들만 ‘이상한’ 세계로 흘러 들어온다.

‘이상하지 않은 세계’, 즉 현실의 여자들에게는 매일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여자 하나 죽은 걸로 큰 뉴스를 띄우지 않는 세계에서 여자들은 모두 같은 분노를 느낀다. “다행은 행운이 많다는 뜻이기보다/ 위기를 모면한 이의 탄식처럼 들려” (「다행은 계속된다」) ‘나’ 이외의 여성이 살해되어 없어질 때 생기는 분노와 부분적인 죄책감들은 김이듬이 현실 세계를 들여다볼 때 그의 화자에게 조금씩 묻어 ‘이상한’ 세계로 도망친 화자에게도 전이되어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상한 세계는 존재를 상실당한 화자의 안식처가 되어 주려는 듯하다. 시인의 화자가 아주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 있다. “다행을 열 개 모으면 행운을 한 개 주는 가게가 있으면 좋겠다”(「다행은 계속된다」)는 시인의 다정함이, 사회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무기력한 화자와 독자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그런데도 “그나마라는 부사는 생략하자/ 최악은 아니니까 더 나쁠 수도 있었겠지만”(「다행은 계속된다」)이라는 말로 ‘이상한’ 세계에 리얼리티를 부여하여 현실 세계를 ‘없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도록 한다.


결국 희미해진 채로 나에게서 떨어진 나는 어디로 갔을까? 나에게서 떨어진 나도 나일 수 있을까? ‘이상한’ 것처럼 보였던 세계가 현실 세계와 맞물릴 때 누군가 ‘원하는’ 세계처럼 변모한다. 시인이 바라 마지 않는 세계는 현실 세계의 누군가가 강렬히 원하는 세계이며, 그 누군가는 현실 세계에서 탈각된 김이듬의 화자다. 그의 부서지고 지친 화자는 현실 세계의 소수자이며 여성이다. 사회에서 버려진 여성들은 너무나 많고, 김이듬의 세계는 그런 여성들을 포용한다. 이는 김이듬의 시적 세계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대변한다. 불지 않은 풍선에 그림을 그리고, 그 풍선에 바람을 넣으면 고무가 팽창하여 그림의 크기가 커진다. 그런데 이때의 풍선은, 절대로 터지지 않는 풍선이다. 팽창으로 인하여 그림이 왜곡되어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어도 그 그림은 분명히 김이듬이 그린 그림이다. 풍선에 들어찬 바람은 여성이라는 주체의 고통이며 발악이다. 점차 희미해지며 결국에 사라진 것 같아 보였던 이들은 풍선 안, 숨결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이듬이 그들의 세계 바깥에,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의 벽면에 그린 그림은 무엇인가.


 “어쩌면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후배에게」), “어쩌면 삶에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폐가식 도서관에서」)와 같은 희망의 그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장들은 시인의 사랑을 대변한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시인의 낙관이 독자들에게 힘을 부여한다. “제 대표작은 아직 못 썼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쓸 예정이에요”(「내일 쓸 시」)라고 말하는 시인을, 희망이라는 안식처를 제시해 주는 시인에게 독자는 무조건적으로 사랑에 빠진다. 어떠한 현실 세계의 고통들이 풍선을 짓이겨 와도 풍선은 터지지 않는다. 김이듬이 아직 ‘대표작’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자각몽」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며 “생생한 생각은 결여된다/ 자몽을 살짝 넣은 자몽에이드처럼”이라는 문장으로 마지막 연을 채우는 시인의 유머러스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본다. 자각몽과 자몽. 시고 쌉쌀한 과육 속, 어쩌다 발견되는 미미한 단맛이 마치 시인의 사랑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시인의 희망과 따뜻함을 발견할 때, 나는 비로소 시인의 ‘이상한’ 세계로 초대된다. “사는 걸 꽤 좋아하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시인의 ‘이상한’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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